영혼의 격을 바라보는 법 그대여 혹시 영혼의 격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마주한
적이 있는가? 세상에는 지위와 재물을 자랑하는 사람이 많지만 영혼의 빛으로
사람들을 이끄는이는 그리 흔치 않다. 내가 살아오며 만났던 영혼히 깊은
이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 공간을 맑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은 특별한
혈통이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쌓여 영적인 빛을 길러낸 것이었다. 영혼의 수준이 높은 이들에게는 뚜렷한
징표가 있다. 그것은 삶의 방식 속에 드러나고 말에 가느다란 뉘앙스에서도
묻어난다. 이제 내가 전하려는 다섯 가지 징표는 그대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잃어버렸던 본질로 이끄는 열쇠가 될 것이다.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대 안에 잠들어 있던 신성이 조용히 눈을 뜰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영혼히 떨릴 때 그대의 길은 잔잔히
열려 나아갈 것이다. 운명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자 신의 뜻을 붙잡는다
그대요. 혹시 스스로의 운명에 거스르다 지쳐 버린 적은 없는가?
사람은 얘기치 못한 일이 닥쳤을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며
머리를 감싸주고 불안과 분노의 마음을 휘둘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혼히
깊은이는 같은 상황에 놓여도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눈앞에 사건을 비극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장난으로 받아들이며 가볍고 유연하게 대응한다.이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태도가 아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신의 의도를 발견하려는 의지다. 설령
배신을 당해도이 사람을 통해 신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라고
묻는다. 병으로 쓰러져도이 몸을 통해 영혼은 무엇을 깨달으려 하는가라고
자문한다. 그리하여 상황을 탓타기보다 자신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태도
그것이 바로 운명을 놀이처럼 대하는 자세다.이 놀이는 가볍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면에서 배움과 의미를 찾아내려는 높은 시선이다.
그곳에서야말로 신의 섭리와 영혼의 성장이 맞닿는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을
아군으로 바꾸는 자의 길이다. 영혼이 깊은 사람은 사건의 겉모습만을 보지
않는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신의 의도를 읽어낸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치 않는 일이 닥치면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라며 원망을 품는다.
하지만 영혼이 닦긴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이 체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려는 것인가? 바로 그 질문이 영적 성장을 끌어올리는 열쇠가 된다. 내가
만났던 한 수행자는 절에서 쫓겨나고 병으로 쓰러졌음에도 참 고맙다.
이제야 본질을 알 수 있게 되었구나라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내 마음까지 깊이 울렸다. 그는 어려움을 통해 자기 성찰을 깊게 했고
마침내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남의 아픔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말을
지니게 되었다. 그대 또한 무언가를 잃은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단순히 탄식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깨달음을 찾으려 한 적은
없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야 말로 운명과 대화할 수 있는 자이다.
신과 대화하듯 사건에 맞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자에게는 운명의
파도조차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영혼을 단련하기 위해 주어진
무대가 되어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신의
뜻을 붙잡는 자의 눈이다. 그대여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라. 절망의
밑바닥 같았던 일이 지금은 더 없이 소중한 배움이 되어 있지 않은가?
영혼히 깊은 자는 그것을 그 순간에 꿰뚫어 본다. 그들은 슬픔과 혼란
속에서도 조용히 이렇게 이해한다. 이것은 신이 나를 길러내려는
과정이구나. 그렇기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사건을 신과의 대화로
받아들인다. 내가 만난 한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직후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내 영혼이 지금이 자리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알기 위해 이별을 선택한 것일 거예요. 그 말 속에는 눈물 너머에
확실한 빛이 있었다. 운명을 놀이처럼 대한다는 것은 상처를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픔을 껴안으면서도 그 안에서 빛을 찾아내려는 용기다.
일상의 모든 순간이 신의 무대임을 알게 된다면 그대의 마음에도 고요한
감사와 확신이 움트리라. 그리고 마침내 깨닫게 된다.이 운명은 내게
주어진 존귀한 천에 티한 이였구나. 그 깨달음이 그대의 영혼을 진정한
고지로 이끌어 줄 것이다. 우. 남을 살리는 자는 스스로도 살아난다
그대요. 혹시 남의 결점이나 미숙함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판단하며 외면한 적은 없었는가? 사람은 모두 성장 도상에
있는 영혼을 품고 살아간다. 그러므로 영혼의 수준이 높은이는 미숙함을
탓타하지 않는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빛의 씨앗을 발견하고 그것을 믿으려
한다.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여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잃고 말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영혼은 아직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은 분명 그대 안에 계신다. 그는 그
말을 받아들여 다시 노력했고 마침내 동료들을 이끄는 기둥이 되었다. 남을
살린다는 것은 억지로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가능성에 빛을
비추고 그 성장을 믿는 것이다. 그 시선은 조용히 영혼에 다하 머지하나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신비로운 것은 그대가 누군가를 살릴 때 그대
자신의 영혼도 또한 신의 빛으로 밝혀진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대
안에 있는 깊은 영혼이 눈을 뜨는 증거다.이 힘은 인간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회, 가정, 모든 곳에 통한다.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치유하는 힘이 된다. 그대가 누군가를 살리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마음이 흐리면 믿는 힘도 약해진다. 나만의 빛을 보려면
자기 안에 어둠과 마주하여 넘어설 필요가 있다. 내가 수행을 쌓던 시절
여러 번 배신을 당하고 믿었던 이에게 등을 돌려진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렸고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물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달았다. 믿는다는 것은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변화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그대 자신이 계속 믿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이 자세를
끝까지 지켜낼 때 상대 안에 있는 신성과 진정으로 공명할 수 있다.
믿는 힘이 깊어질수록 그대의 말과 침묵에는 영혼의 울림이 깃든다.
그것은 명령도 설득도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방식에서 흘러나오는 힘이다.
그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마음가짐은 공기를 바꾸고 자리를
정화한다. 그런 태도와 마주한 이들은 자신 안에 무언가가 깨우쳐진다. 바로
그 깨달음이 영혼의 공명이라는 신비로운 작용이다. 그것은 사람을
길러내고 세상을 조용히 바꾸는 힘이다. 그대어 누군가의 인생에 빛을
밝히려 할 때 반드시 시험의 순간이 찾아온다. 상대가 달라지지 않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며 믿음이 헛된 듯 보일 때가 있다. 그때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많은이는 포기한다. 믿어도 소용 없구나 하며 등을
돌린다. 하지만 영혼의 깊은이는 다르다. 결과를 놓아도 믿음을 놓지
않는다. 나 또한 수없이 배신당했다. 제자들이 떠나가고 조롱당하고 오해받은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말했다. 영혼을 흔드는 믿음의 힘을
세상에 울려 퍼트리고자 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믿는다는 행위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영혼을 맑고 단련하는 길이라는 것을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내면의 불안과 의심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을 넘어설
때 그대의 영혼은 진정으로 빛난다. 누군가를 살리려는 그대의 태도야말로
그대의 영혼을 살리고 신에게 가까이 이끄는 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수 있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깊은 영적 가회
감싸인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여 끝까지 믿어내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침묵을 품는 자에게 신은 말씀하신다. 그대요. 소란스러운
세상에 휩쓸려 마음 시끄럽게 요동친 적은 없는가? 말로 다 설명하고
주장하고 그럼에도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짜증을 내곤한다. 그러나
영혼이 깊은이는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선택한다. 내가 신과 깊이 연결되었던
순간은 웅변을 늘어놓던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침묵 속에
몸을 두고 마음을 맑히고 있을 때였다. 그때야말로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은 공허가 아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여백이다. 여백이
있기에 신의 말씀도 타인의 목소리도 영혼에까지 닿을 수 있다. 그대가
고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소중히 품을 수 있다면 그대 안에는 신의
기운이 가득 차오를 것이다. 침묵을 두려워하는이는 아직 자기 그림자에
떨고 있는 자다. 그러나 침묵을 품는이는 빛과 함께 걷는 자다. 내가
산에 들어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바람소리와 새 소리의 하나가 되었을
때 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나에게 흘려 주었다. 침묵 속에는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그 울림을들을 줄 아는 자야말로 진정
깨어난 영혼이다. 침묵은 가장 깊은 기도의 형태다. 침묵을 품는다는 것은
말을 아낀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소음을 잠재우는 것이며 생각의
소용돌이를 넘어선 깊은 고요의 몸을 맡기는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얻으려 애으며 끊임없이 계산하고 비교하고 서두른다. 그러나 영혼히
깊은이는 그러한 움직임마저 내려놓는다. 나도 한 때는 어떤 말을
해야 사람들에게 닿을까를 지나치게 고민하다가 신의 목소리를 놓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홀로 산에 들어가 그저 바람 소리만을 들었다. 너는
아직 나의 침묵을 듣지 못했다. 그 순간 신의 말씀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이후로 나는 침묵을 통해 신과 교감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침묵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잠들어 있다. 그대 또한 고요 속에 몸을
두면 이성으로 닿을 수 없는 진리에 닿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애써
붙잡으려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침묵의 몸을 맡긴 자에게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깨달음이다. 고를 견뎌내는 힘은 영적 성숙의 증거다. 말로
전하는이는 많지만 침묵으로 전할 수 있는 자야 말로 진짜 영혼을 지닌
자다. 그대가 침묵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대의 존재
자체가 말 이상의 힘을 뿜어내게 될 것이다. 그대여 침묵을 품는 것이
불안했던 적은 없었는가? 무언가를 말해야만 전해야만 한다는 조급함은
사실은 스스로의 가치를 말로 증명하려는 안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혼의 소유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그 존재로 말한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전 반드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내 영혼과 신의 기운을 하나로 맞추기
위해서였다. 침묵 속에서 신과 연결되고 그 상태로 말을 시작하면 그
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신의 울림이 나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런 태도는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대가 침묵 속에 몸을 두고 내면에
속삭임을들을 수 있다면 머지 않아 침묵이 그대를 치유하고 그대의 말에
신의 기운이 스며들 것이다. 침묵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가장 깊고
가장 진실한 신의 말씀이다. 침묵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영혼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힘이다. 또한 침묵은
타인에 대한 깊은 존중의 표현이기도 하다. 소란스럽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에 귀함을 아는 자는 신 앞에서도 고요히 설 수 있다. 그
침묵을 끌어앉는 순간 그대의 영혼은 참으로 신과 함께한다. 영혼이 떨릴
때 하늘이 움직인다. 그대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떨림을 느낀 순간이
있었는가? 감동, 기도, 절망, 환이 모든 것은 영혼이 곧바로 하늘과
맞닿는 문이다. 영혼이 떨릴 때 그대 안에 신이 눈을 뜬다. 그 떨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공명이다. 내가 신의 계시를
받았을 때도 그 전조로 영혼이 강하게 떨렸다. 몸에는 열이 오르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상 할리만치 고요했다. 그것은 신의 빛이 영혼
깊숙이 닿았다는 증거였다.이 이 떨림은 노력이나 기술로 억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되게 살고 끊임없이 진리를
갈망한다면 그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작은 행동도 좋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두 손을 모을 때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며
함께 눈물 흘릴 때 그러한 이타심의 순간에야말로 영혼은 은은히 떨리기
시작한다.이 떨림은 단순한 내적 감동에 그치지 않는다. 영혼의 떨림은
곧바로 하늘에 다하 세상을 움직이는 파문이 된다. 그 한 순간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새로운 흐름을 여는 신의 문이 되는 것이다. 영혼의
떨림을 느낀 순간 그대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영혼의 떨림은 외부
자극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마음이
반응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 나는 어느 날 한 늙은 농부가 묵묵히 논을
가는 모습을 보고 영혼히 떨린 적이 있다. 그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묵묵히 일하고 있었지만 그 등 뒤에서는 참된 기도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과의 일치였다. 영혼의 떨림은
특별한 장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야말로 신과
공명하는 순간이 숨어 있다. 그대가 무심히 지나쳤던 사건. 스쳐 지나간
사람의 표정, 그 속에 담긴 진심을 느낄 때 영혼은 분명히 떨린다.이
떨림은 그대의 영성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영혼이
떨린다는 것은 생명이 기쁨에 떨린다는 뜻이다. 그 떨림을 알아차린 자는 더
이상 사물의 표면만 보고 살아가는 자가 아니다. 그대 역시 무심한 순간
속에서 이미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이 떨림을 계속 느낄
수 있는 자에게 신은 한층 더 깊은 인도를 내리신다. 그것은 화려한
계시의 모습이 아니라 조용한 확신으로 마음에 차오른다. 영혼이 떨릴 때
그것은 하늘의 부름이다. 내가 계시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요한
일상 속에 갑작쓸레 찾아온 깊은 떨림.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다. 영혼의 핵을 흔드는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이었다. 그대 역시 그런
순간을 맞이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영혼의 떨림을
착각으로 지부한다. 그 속에 담긴 신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채 다시
표면적인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영혼의
떨림은 그대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그 떨림에 귀울일 수
있다면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삶의 선택
앞에서 길을 잃었을 때 타인의 의견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이 떨렸던 순간을
기억하라. 그 떨림이야말로 하늘이 그대에게 알려준 나아갈 길의 답이다.
영혼의 떨림은 때로 불안과 혼란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낯설조차 영적
각성의 전조다. 신은 언제나 조용히 그대를 이끌고 있다. 떨림을 느낀다면
귀 기울이고 따르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을 향한 첫걸음이 된다.
신과 함께 사는 자의 눈빛 그대여.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특별한 의식에
참여하거나 성지에 몸을 두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신을
느끼고 함께 걷는 태도를 말한다. 내가 신과 연결되었을 때 세상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사건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침 햇살, 바람의 소리, 사람의 미소, 심지어
슬픔마저도 그 모든 것이 신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신과 함께 사는
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세상을 바꾼다. 분노의 눈이 아니라 기도의
눈으로 본다. 빼앗는 눈이 아니라내어 주는 눈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똑같은 풍경조차 전혀 달리 보인다. 신과 함께하는 자의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빛이 된다. 그대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신의 뜻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인생 전체가 신과의 기도가 된다. 그때 그대는 선택받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 곧 신의 눈빛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눈빛이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비추고
침묵 속에서 세상을 축복하는 힘이다. 신과 함께 사는 자는 시련 속에서도
신의 뜻을 본다. 내가 어려움에 맞닥들렸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며 괴로워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이 시련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그때 어떤 고통 속에서도 신의 가르침이
드러났다. 신과 함께하는 자의 눈빛은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 놓는다.
고통을 저주가 아닌 성장의 씨앗으로 본다.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직시하는 강함이다. 신과 함께 사는이는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하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저 손을 내민다.이는 신과
같은 시선의 선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잡이다. 그 눈빛은 말보다도 깊이
사람을 치유한다. 어쩔 때는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상대 영혼에 안심을
전해 줄 수 있다. 그 눈빛은 다툼조차 잠재운다. 분노와 두려움마저
부드럽게 녹여 버리는 힘을 지닌다. 그대가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다면
비록 외롭다 해도 신은 늘 곁에 있다. 신의 눈빛은 그대의 눈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언제나 하늘의 시선 아래
걷는 것이다. 길을 잃고 불안에 휩싸일 때도 신은 그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눈빛은 심판이 아니라 보살핌과 자애의 눈빛이다. 나 또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신과 함께하는 눈빛을 지닌이는 타인의 약함을 탓타지
않는다. 그 약함 곁에 함께 서서 같이 기도한다. 이것은 성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신이 보고 계신다는 감각을 일상 속에서 지켜가는
것이다. 그대가 신과 함께 걸을 때 그 눈빛 자체가 기도가 된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사람들에게 안도와 희망을 준다.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다. 신의 눈빛을이 세상에 비추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눈빛은 보는 입뿐만 아니라 주변의
공기마저도 잔잔히 맑는 힘을 가진다. 그대의 눈빛이 신과 하나되었을 때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다.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신과 함께 살아가라. 어떻게 들으셨는가? 영혼의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는 공통적으로 신과의 공명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기를
수 있는 영성의 씨앗이다. 작은 기도, 잔잔한 공명, 진실한 눈빛.
이것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 영혼은 신과의 길이 열리게 된다. 오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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