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8일 삼성전자 회장 이병철이 도쿄에서 기자 회견을
엽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다.
일본 경제신문 일면 헤드라인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무모한 도전 10년 내 실패 예상. 그날 [음악] 한국은 또 한 번
불가능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반도체도 자동차도 기술은
제로였습니다. 하지만 10년 뒤 세계는 경악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일막 기술 없는 나라의 선택.
1980년대 초반 한국 경제는 기로에서 있었습니다. 중화학 공업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면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당시 경제 기획원 자료를
들여다봤을 때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음악]
첨단 산업 없이는 선진국 진입 불가능.
청와대 경제 수석실 회의록을 보면 1982년 여름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반도체냐 [음악] 자동차냐 둘 다하기엔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둘 다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실 삼성은 1974년부터 이미 반도체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한국 반도체라는 회사를 인수했어요. 하지만 만든 건 단순 조립
제품이었습니다. 설계도 없고 핵심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저 외국에서 드려온 부품을 조립만 했을 뿐이죠. 그런 삼성이 1983년
세계 최고난이도 기술인 64K디램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당시
64K디램은 일본과 미국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병철 회장의
비망록을 읽으면서 [음악]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그는 70대였습니다.
마지막 승부였던 거죠. 그리고 자동차. 현대자동차는 1967년부터
포드 자동차를 조립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1973년 [음악] 포드가
손을 un니다. 한국은 자동차 시장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분노했습니다. [음악] 그리고 1974년 영국 기업과 기술
재를 맺고 독자 모델 개발에 돌입합니다. 제가 당시 설계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음악] 수백장의 청사진 연필로 그은 선
하나하나에 엔지니어들의 땀이 배어 있었습니다.
1976년 12월 한국 최초 고유 [음악] 모델 포니가 세상에
나옵니다. 하지만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음악]
고물차 일본차 짝퉁 심지어 국내 언론조차 냉소적이었습니다.
이막 엔지니어들의 불면에 빵. 1983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가 서울 구로공단에 문을 엽니다. 연구원 30명 평균 나이
29세.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6개월 64K디램 개발까지요.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원 중 한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매일밤 12시가 넘어야 집에 갔어요. 주말도 없었죠. 아이 얼굴 보는게
일주일에 한 번이었습니다. 눈물이 글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래도 우린 해냈어요. 삼성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기술이 없으면 사람을 데려온다.
삼성은 미국 실리콘 밸리와 일본에서 [음악] 한국계 엔지니어들을
스카우트하기 시작합니다. 연봉 두 배, [음악] 주택 제공, 자녀
교육비 지원. 당시로선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엔지니어들이 거절했습니다.
한국에서 반도체 불가능해요. 그럼에도 몇몇 층은 돌아왔습니다.
왜일까요? 한 엔지니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조국이 해낸다면
나도 일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음악]
1983년 9월 구로공단 연구소 새벽 [음악] 3시 형광등 불빛 아래
30명의 엔지니어가 현미경을 들여다봅니다.
실리콘 웨이퍼 위에 새겨진 미세회로 마지막 테스트 전원을 unkun니다.
[음악] 모니터의 신호가 뜹니다. 성공.
64K디램 작동. [음악] 그 순간 연구소는 환우로 가득 찼습니다. 여섯
개월 만에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삼성은 일본 샤프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샤프가 거절합니다. 경쟁자를 키울 수 없다. 결국 삼성은
독자 개발로 방향을 틀었고 그게 오히려 전화 위복이 됩니다. 일본
기술에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한편 현대자동차의 폰인은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1976년 출시 이후 국내 판매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해외 진출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1977년 미국 수출 시도 실패 안전 기준 미달 1979년 유럽 수출 시도
실패 품질 문제 정주영 회장은 분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84년 캐나다에서 기회가 옵니다.
캐나다 자동차 딜러 한 명이 포니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가격 대비
괜찮은데요. 현대차는 파격적인 제한을 합니다. 10년 10만 km 보증.
당시 일본차도 하지 않던 조건이었습니다.
캐나다 딜러는 반신반위하며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1986년 보니 캐나다 수출 시작 첫 판매량
6,800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였습니다.
삼막 일본을 제치다. 1985년 삼성 반도체는 256K디램 개발에
성공합니다. 일본보다 6개월 늦었지만 격차를
빠르게 좁혀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됩니다. 제가 1988년 삼성 반도체 공장을 취재한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음악] 당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공장. 흰색 방진복을 입은 엔지니어들은 마치
우주 비행사 같았다. 그들의 눈빛엔 오직 하나 일본을 이기겠다는 집념만
보였다. 1989년 삼성은 3M가 디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합니다. 일본을 제쳤습니다. 도쿄 증권 시장이 순렁이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주가가 일제히 하락합니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았다는 헤드라인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990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거액을 투자해 차세대 반도체 개발해
나섭니다. 반도체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삼성은 더 공격적으로 나갑니다. 1992년
세계 최초 63 디램 개발 이번엔 일본보다 1년 앞섰습니다. [음악]
그리고 그의 말.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일본
NEC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섭니다. 여기서 제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 삼성이 세계 1위에 오른해 일본 반도체 업계 회의록이
공개됐는데요. 한 일본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삼성을 너무 우습게 봤다. 그들은 우리가 쉬는 시간에도
일했고 우리가 만족할 때도 더 나은 걸 추구했다. [음악] 현대차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986년 캐나다 수출 성공 이후
1988년 미국 진출에 [음악] 성공합니다.
첫 모델은 엑셀 포니의 후속 모델이었습니다.
출시 첫 미국에서 [음악] 16만대 판매. 당시 일본 차를 제외하고 외국
브랜드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이었습니다.
198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 현대차 부스 앞에 미국 언론이 모여듭니다.
한 기자가 [음악] 묻습니다. 한국차가 일본차를 위협할 수
있을까요? 현대차 미국법인장은 이렇게 답합니다. 10년 안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음악] 그 말은 현실이 됩니다. 사실 현대차의 미국
진출 뒤에는 놀라운 [음악] 마케팅 전략이 있었습니다. 바로 10년
10만 마일 파워트레인 보증.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미친 짓이다. [음악] 손해본다.
하지만 현대차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품질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은
적중합니다. 보증 수리율은 예상보다 훨씬 낮았고
오히려 품질 좋은 한국차라는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합니다.
1992년 말 한국 자동차 생산량 세계 5위 불과 15년 전 조립만
하던 나라가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이 된 겁니다. 그리고 반도체는
세계 1위. 누가 예상했을까요? 1980년대에 초 일본이 비웃던 그
나라가 10년 만에 일본을 제치고 정상에 오를 줄 사막 빛과 그림자
1993년 봄 삼성전자 기음 공장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 라인이
가동됩니다. 하루 생산량 100만 개.
삼성은 명실상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지배자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진실을 발견했습니다.
승리의 이면에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노동자들 중 [음악] 일부가
백혈병과 뇌종양 진단을 받습니다. 처음엔 우연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사례가 늘어나면서 일부 [음악] 시민 단체와 유족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반도체 공장의 화학 물질 때문
아닌가? 삼성은 부인했고이 문제는
2000년대까지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제가이 부분을 다루는 이유는 역사의
진실은 한쪽 면만 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만든 사람들 중 일부는 [음악] 대가를 치어야
했습니다. 현대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90년대 초 급격한 성장 뒤에는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이 있었습니다. 1990년 울산
공장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는 단순했습니다.
인간답게 일할 권리. 당시 자동차 조립라인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서서 일했습니다. 주 6일 근무가 기본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1993년 기준 반도체와 자동차는 한국 수출의 [음악] 30%를
차지합니다. 고용 인원 100만 명, 연관
산업까지 합치면 300만 명 이상이이 두 산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2024년 현재 삼성전자는 여전히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입니다. 현대
기아차는 세계 자동차 판매 3위. 그 시작은 1980년대 불가능하다는
비웃음 속에서였습니다. 제가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느낀 건
한국의 산업화는 단순히 경제 성장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한 세대
전체의 헌신이었고 때로는 희생이었으며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들려드린 이야기는 반도체와
자동차라는 두 산업의 기적입니다. 하지만이 기적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의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이
밤낮 없이 일하고 땀 흘리고 때로는 희생했습니다.
1980년대에 초 세계는 한국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역사는 늘 같은
질문을 남깁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 앞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음악] 오늘 이야기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