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늘 어 시대를이긴 시인의 믿음 두 번째 시간으로이 요셉 아 고난의
현장을 사명의 자리로 바꾸다. 아이 제목으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읽은 우리가 읽은이 본문은 요셉의 아버지에 즉 야곱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당시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기 때문에이 요셉의 아버지 장례식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치뤄졌습니다. 아 실제로 창세기 50장 3절을 보게 되면 애굽
사람들이 70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다. 이렇게 나옵니다. 아
70일 동안이 장례가 진행이 된 것이죠. 이처럼 야곱의 죽음으로 온
애굽이이 슬픔으로 잠겼던 그때 그 시간으로 우리 함께 잠깐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온전히 슬퍼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냐면
바로 요셉의 형들입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은 폭풍전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다들 아시겠지만이 요셉이 어릴 때이 요셉의
형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요셉을 죽이려 했고 또 결국 죽이진
않았지만 노예로 팔아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죠. 그런데 그런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의 형들은이 장례식 내내 생각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요셉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어릴적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고 또 서로를 말리지 않았던 그것을 원망하기도 하면서 장례
기간 내내이 요셉의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장례가 모두 마치고
형들은 고민고민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사람을 시켜서
이렇게 요셉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남기신 유원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희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이 아버지는 내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이렇게 유원을 남겼으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사람을 시켜서 보낸 거죠.
아, 그런데 형들이 말한이 아버지의 유원은 형들이 지원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면 창세기 47장을 보게 되면 야곱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가장 먼저 누구를 부르냐면 요셉을 부릅니다. 그니까 만약
야곱이이 형들의 잘못을 네가 좀 용서하라고 유원을 남기려 했다면 이때
가장 먼저 요셉을 불렀을 때 말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봐도이 야곱이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지 말고 나의 고향 가나안으로 묻어
달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뿐만 아니라이 야곱의 임종의
상황을 창세기 47장에서부터 49장까지이
세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죠. 물론 성경의 저자가 생략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문맥상 흐름을 볼 때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형들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라면이
만약 여러분들이 요셉이라면 형들이 전한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을
했겠습니까? 그래 아버지가 그렇게 유원을 남겼다고 하니 아 내가 용서를
해야겠다. 이런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용살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직접 와 가지고 싹싹 빌면서
잘못했다고 우리 좀 살려 달라고 그렇게 해도 모자랄 판에 사람을 보내
가지고 아버지 핑계를 대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유원을 남겼으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때 화가 가았다가도 다시 일어날 것 같은
거죠. 아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오늘의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은 애굽의 제2인자였습니다.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지고이 요셉의 말 한마디면 형들뿐만 아니라 형들의 가문
전체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죠. 아,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복수할 이유도 있었고 또 능력도 충분했던 요셉이
형들을 향해 칼을 드는 대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다시
한번 창세기 50장 16절에서 17절 말씀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내 형들이 내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데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들을 때에 울었더라. >> 요셉이 그들에게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울었더라. 그니까 형들이 직접 와서 엎드린 것도 아니고
그냥 형들이 전한 말을 듣는데 울었던 거죠. 저는 오늘이 요셉이 흘린
눈물의 의미를 같이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이
요셉의 눈물 때문에 야곱의 가문도 또 이스라엘의 민족도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의 눈에도 이러한
위로와 평안의 눈물이 맺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 그렇다면
형들의 메시지를 받고 전달받은 요셉이 눈물을 흘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요셉이 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2장을 보게
되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을 약 20년 만에 제회를 하고이 요셉은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몰래 웁니다. 아,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형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죠. 그래서 막내 베냐민을 인질로 삼아서 형들을
시험합니다. 아 그런데 형 유다가 나서서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며 그렇게 희생하는 모습을 볼 때이 요셉은 참지 못하고 대성 통곡을
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아마이 순간에 요셉의 상처는 조금씩
회복되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형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45장 4절에서 5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비록 형들이 자신에게 한 일이
괴심하기도 하고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되지 않았지만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그들을 용서하고 또 화해하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은 그랬다 할지라도 형들은 이러한 요셉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이죠. 그니까 형들 스스로도이 일이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형들은이 요셉이 지금 감정에
복받쳐 가지고 저렇게 얘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변할지 모른다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가 어쨌든 살아 있으니까 아버지
때문이라도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야곱과 함께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내려온지
17년이 흘렀지만 형들은 여전히이 요셉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병세가 점점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형들의 불안도 점점 더
커져 갔죠.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이
형들의 두려움은 정점에 치다르게 됩니다. 그리고이 장례식이 다
마치고이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요셉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아버지가 자신들을 용서하라고 유원을
남겼다며 그렇게라도 자신들이 살고자 했던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살기에 급해서 거짓말을 일삼았던이 형들의
뻔뻔하고 얄미운 행동에도 요셉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형들의 두려움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겉으로는 평화로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일같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며 30년
전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던 그 과거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이
형들의 모습이 요셉의 눈에 보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형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요셉은 용서를 넘어 형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긍휼함은 가슴을 타고 올라와 요셉의 눈에서 눈물로
쏟아져 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셉을 성공한 총리로
많이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요셉처럼 되게 해 달라고 이렇게 이제 기도를 하는 걸 많이 봅니다.이
요셉이 총리가 된 것처럼 좋은 직장 또 좋은 기업과 좋은 정치가 되게 해
달라고 이렇게 이제 기도를 하는 것이죠. 근데 요셉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단순히 이방인으로서 애굽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총리가 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정말 원수와 같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상처를 끌어앉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울 수 있는 긍휼한
마음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우리는 작은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때문에 누군가를 평생 미워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죽일만큼 미워해서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 쫓아다니면서
방해하고 나를 모함하고 또 그로 인해서 내가 큰 피해를 겪고 또 내
주변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상처를 입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의 손에 노예로 팔려갔을뿐만 아니라 한순간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애쓰면 애쓸수록
인생의 점점 밑바닥을 향해 내려간 것이죠. 그럴 때마다 내 인생은 왜
이런 것일까? 내 인생은 아무리 노력해도 왜 이렇게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누가 떠올랐을까요? 자신을 구덩이로
내전졌던 그 형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형들 때문에 내가이 모양이구나.
그 형들 때문에 내 인생이 이지경이구나. 그런 미움과 원망이
점점 차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요셉의 마음은 다 알지 못하지만
멍이 들고 그 형들에 의해서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본디이 마음에 상처라는 것이 쉽게 아물지도 않을 뿐더 그 마음의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주변 사람들을 찌르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그 사람이
다가와 내 상처를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서 선재적으로 망어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날카롭고 예민한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격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상처가 너무 아프다고 너무
쓰라리라고 외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처 투성이었던 요셉은
그 상처로 다른 사람들을 찌르거나 다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상처 입힌 형들의 상처를 끌어앉고 우는 자가 된 것이죠. 저는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그래서 정말 상처하는이 세상에서
위로자 평안을 가져는 주는 자로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자, 그렇다면 과연 요셉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해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수와 같았던 그 형들의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고
그 형들의 상처를 끌어앉고 울 수 있는 자가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요셉이 노예에서부터 총리가 되기까지 지나온
13년의 세월을 살펴봐야 됩니다. 아마 요셉도 처음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갈 때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 일어난 것일까? 형들은
도대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원망과 미움에 가득찬
질문들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을 위로하기는
커녕 낯선 보디발의 집이라는 광야로 밀어넣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었던 그 낯선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요셉은 늘 언제나 그와 함께하고 계셨지만 알지 못했고
바라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조금씩 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이 창세기 39장을
보게 되면 노예로 팔려간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단어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창세기 39장
2절에서 3절 21절을 같이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처음에는 그저 살기 위해서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그 시간을 통해
요셉은 피해자가 아니라 사명자로 빚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이
요셉의 과정을 시편 말씀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착골를 차고 그의 몸은 새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오늘날 주변을 조금만 돌아봐도 위로에
관한 글과 영상이 넘쳐납니다.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조금만
검색을 해 봐도 수많은 위로와 글의 위로의 글과 영상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잠깐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진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상처는 오직
하나님만이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자꾸만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위로받고자 한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밀어 넣으십니다. 강제적으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이죠.
비록 요셉은 광야와 같은 곳에서 인생의 최악의 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선 그런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그를 단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하나님만 붙들었던 요셉의 마음에는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상처성이었던
그의 상처만 보였던 그의 눈에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창세기 40장 6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왕의 두 고의 관원의 수정을 들게 되죠.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눈에 그 고의 관원의 얼굴에서 근심이 있음을
읽어내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힘들면 다른 사람의
힘듦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에 모래 한만 들어가도 그 아픔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 됩니다. 아무리 전쟁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아무리 수많은 아이들이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도 일단 내
눈에 들어간이 모래 한날이 너무 아픈 거죠. 그래서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프면 그 힘듦을
해결하느라 다른 사람의 힘듦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삶이 너무
힘들고 내 상처가 너무 아픈데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요셉이 계속해서 자기의 상처에 매몰되고 자기의 힘과
어려움에 갇혀 있었다면 결코 그들의 근심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와 같은 그 시간을 지나며 살기 위해서 하나님만 바라봤던 그
시간을 통해 조금씩 요셉의 상처가 아물고 그의 마음이 회복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며 근심을 읽어낼 수
있을만큼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시선을 자기의 상처에서 하나님에게로
하나님에게서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던 거죠. 사실 저는
하나님께서이 요셉이 너무나도 중요한 사명을 맡았기 때문에이 요셉이
감당해야 될 사명이 너무 크고 중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광야로 내몰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이 이 요셉에게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살펴봐야 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무슨
약속을 하냐면 내가 너에게 난과 민족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 때 그 약속이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르서 점점점 그 가정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민족이 되기 위해선 한참 모자랐죠. 그런데 문제는이
이스라엘이 민족이 되기 위해선 넘어야 될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는이 식량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닥치게 될 기근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돼서이 문제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스라엘은 민족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족뿐만 아니라 전세적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가나은 끊임없이 부족간의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견변한 군사력조차 없었던이 야곱의 가족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그 전쟁 가운데 살아남는다는 것, 민족으로
성장하기까지 버텨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이 중대한 사명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요셉을 독하게 정말 독하게 광야에서 훈련을 시켜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저에게 너도
요셉처럼 되고 싶지 않니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그런 사명을 감당할 만한 그릇도 안 되고 또 그 사명을 굳이 제가
감당할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 제발 저를 광야로 내쫓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이 요셉을 총리로 만들기 위해서 광야로 보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셉의 마음에 난 상처였습니다.
여러분들은이 요셉의 상처가 언제 완벽하게 회복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아니면
요셉이 형들을 끌어앉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아닐 것입니다. 요셉이
진짜 그 상처를 회복한 때는 30년 전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그
과거에 갇혀서 매일을 불안에 떨고 있었던 형들의 그 상처를 발견하고 그
상처를 끌어앉고이 고백을 했을 때 요셉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됐을
것입니다. 우리 함께 창세기 50장 20절에서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 >>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 곳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의 상처를 끌어앉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그렇게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는 중에이 요셉의 상처가
완전히 낫게 된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요셉을 총리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그들을 광야로 내몬게 아니라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질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요셉의 마음에
난 상처에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온전케 하시고자 요셉과 함께 광야로 나아가신 것이죠. 그 광야에서
괴로워하는 요셉을 보며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팠을 하나님이셨지만
묵묵히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상처가 이제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라 사람을
살려내는 영광스러운 흔적이 되기를 그 고난의 현장이 사명의 자리가 되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눈물은 오랫동안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형들을 자유케 하였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내었으며 무엇보다 요셉 스스로의 그 마음에 나 있던 피멍이 들고
여기저기 상처로 망가져 있던 그 마음을 온전히 회복시켰던
치료제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과 여러분들의 삶에
일한 요셉의 눈물이 터져 나오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드로박스라는 다큐를 통해서도 소개가 되었지만이 베이비 박스라는이 사역을
통해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또 살려내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 이종락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아, 물론 아직까지도이 베이비 박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버려지는 아이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지금껏 희생하고 섬겨오신 이종 목사님의 수고만큼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 그런데 이종락 목사님이이 베이비 박스 버려진
아이들을 키워내고 또 지키고 보호하는이 사역에 대해서 처음부터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이 이 목사님은 젊은
시절이 수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술만 먹고 나면 집에 들어가 물건을
부수기가 일상이었고 그렇게 가족에게 날마다 상처를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바로 중중 내 변병 장애로 태어나서
3개월 만에 태어난지 3개월 만에 전신마비가 된 아들 은마니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하라고 말했던이
은마니를 목사님 부부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아들 음마이가
하늘나라로 떠나기까지 3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합니다.
평생 병상에 누워 있어 했던이 은마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또 그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며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은마니를 떠나보내면서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 음마니 때문에 자기가 비로써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은마니를 떠나 보내고
어느 날 그 과정을 다 지켜보았던 한 할머니가
은마니와 똑같이 전신 마비가 된 손녀를 목사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이 아이를 감당하지 못해서 목사님이 꼭 맡아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한 것이죠.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목사님 부부는
그 아이에게서 먼저 떠나간 자신의 아들 은마니를 보았고 그렇게 베이비스
사역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종남 목사님 부부의 그 고난의
현장을 하나님께서 사명의 자리로 바꾸신 것이죠.
저는 오늘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저는 어릴적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지냈습니다.
코로나도 아닌데 혼자서 사회적 거리를 두며 그렇게 살았던 것이죠.
아, 특히 교회 사람들과는 더욱 그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목사님이시다 보니까 어릴적 교회에서 아무 생각 없이 했던
말들이 저에게 상처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 거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과의 벽은 점점 더
높아져 갔고 적당히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또 나 또한 사람들에게
피입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저 혼자만의 세상을 살았습니다.
가끔 외롭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그렇게 사는 삶이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아, 정확히 어떤 날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예배하는 중에 찬양을 부르던
중에 또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매일같이 예수님의 가슴에 못을
받고 있었던 저를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참아 주셨고 기다려
주셨고 끝까지 사랑해 주셨던 그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예수님 마음에 못을
박으며 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 안에 혼자
떨어져 있거나 또 교회 안에서 낯설라 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무작정
다가가 말도 걸어보고 또 가까워져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잘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오해를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했고 또 반대로 제가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너무 괴로웠습니다. 제가 준 상처 때문에 시험에든 지체를
바라보는 것도 또 저의 선의를 오해하며 제게 모짓말로 돌아오는
상처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죽하면 제 어머니께서 제가 목사가 된게
기적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겠습니까?
만약 누군가 저에게 오늘 나온 이종락 목사님처럼
혹은 형들에게 버려져 오랜 기간 고통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들을 용서한 요셉처럼 살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가득한 그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고 또 그 과정을 거쳐들을
죽이려 했던 그 원수와 같은 형들을 끌어앉고 용서한다는 것이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길을 걸으라고
하신다면 피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무리 그 과정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그 과정 중에 받는 상처가 아무리 쓰라리고 고통스럽더라도
제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천국에 가서
저를 위해 참아 주시고 저를 위해 품 용서하시고 또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손에 못자국난 구멍을 보여 주시며 제 앞에
서여 계실 예수님 앞에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상처와 아픔이 가득한 여러분들의
주변과 또 세상을 바라보시며 요셉과 같은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한 사람도 인생이 쉽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을 끌어앉고 삽니다. 때로는
너무 서로가 가까워서, 때로는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때로는 서로가 너무 무지해서 때로는 자신의 상처가 너무 아파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더 아프게 하고 또 서로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끌어앉고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강야와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상처와 아픔에 그 하나님이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와 아픔이 누군가를 끌어안을 수 있는 눈물이 되기까지 여러분들이
있는 그 고난의 현장이 사명의 자리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과 함께
아파하고 계시고 결코 여러분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끝까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비록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곳에서
여러분들의 그 직장, 여러분들의 가정, 여러분들의 목장, 여러분들을
아프게 하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그 상처가 여러분들을
살려내고 상처 입은 이웃도 살려내는 눈물로 변하기까지 여러분들의 그
고난의 현장이 사명의 자리가 되기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여러분들 삶에도
반드시 오늘이 요셉에게 주었던 그 긍휼함이 가슴으로 올라와 눈에서 터져
나올 때 내 상처가 회복이 되고 내 이웃의 상처가 회복이 되는 그 고난의
현장이 사명의 자리가 되게끔 했던 그 눈물이 여러분들의 인생과 여러분들의
눈에서 터져 나오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