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의 그림들을 들여다 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스러운 서약이 요가는 재단부터 이권이 충돌하는 거래 테이블
그리고 고된 노동 현장까지 모든 순간에는 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술을 마셨고 하루 종일
취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중세 사람들이
하루 종일 취해 있었다면 도대체 그 거대한 고딕 성당은 누가 지었으며
복잡한 본건 제도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중세 유럽인들의
혈관을 타고 흘렀던 술에 대해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전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14세기 런던의 번화가부터 시골의
작은 마을까지 당시 사람들의 손에는 물 대신 술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물의 공포 때문이었죠. 상하수도 시설이 전무했던 중세
유럽에서 있는 그대로의 생수를 마신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았습니다. 강과 우물은 분유와 폐수로 오염되어 있었고이를 그대로
마셨다간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물을 끓이고 발효시켜 만든 에일은 당시로서는 살균 과정을 거친 안전한
수분 섭취원이었던 것이죠. 그들의 손에 술이 들려 있던 또 다른
이유는 생존을 위한 칼로리 때문이었습니다.
중세 농로들의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밤이
될 때까지 그들은 고된 육체 노동을 버티기 위해 막대한 열량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거친 빵만으로는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영국 소장농들은 1칼로리 섭취량의 최대 50%를
일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취하기 위해 마신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마시는 빵을 먹었던 것입니다.
중세 유럽인들에게 술을 마시는 장소는 철저하게 계급에 따라
나뉘었습니다.이는 그 당시 사회적 위계가 공간적으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죠.
먼저 부와 권력이 모이는 곳 여관입니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등장한 여관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상인과 귀족, 전문직 종사자들을 위한 최고급 사교 클럽이었습니다.
여관에는 술을 따르는 탭스터, 객시를 관리하는 체인벌린, 말을 돌보는
오스텔러 등 수많은 하인이 상주하며 고객의 편의를 도았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장작불이 타오르는 벽날로와 푹신한 침대는 매소운 중세의 추위마저
있게 만들어 주었죠. 그리고이 모든 호사의 정점은 바로 식탁 위에
있었습니다. 신선한 고기요리와 갓비싼 향신료 그리고 그 풍미를 완성하는
최고급 주류가 페어링된 만찬. 이것이 여관이 제공하는 핵심 상품이었습니다.
상인들과 귀족들은 소란스러운 하층민들과 섞이지 않고 오늘날의
VIP 다이닝과도 같은 그들만의 서비스를 즐겼던 것이죠.
여관이 숙박과 식사를 포함한 복합 럭셔리 시설이었다면 오로지 마있는
행위에 집중하길 원하는 이들은 태번이라는 전문 주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서민들이 드나드는 술집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태버는
당대 최고의 와인셀러이자 오늘날의 고급 와인바였습니다. 에일이 지겨워진
도시에 성공한 장인들이나 중간 계급 상인들은 이곳에 모여 바다 건너온
수입 와인을 즐겼습니다. 당시 런던 론바드 스트리트에 위치했던 태번 더
겔리의 와인리스트를 보면 그들의 취향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가스코뉴에서 온 레드 와인, 독일 라인강 뉴역의
화이트 와인, 그리고 지중에의 달콤한 맘지 와인까지 태버는이 귀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비싼 수입 와인을 주문함으로써 진흙탕
속에서 에일이나 마시는 노동자들과 자신들을 구분짓고자 했습니다. 즉
태버는 도시민들의 미식에 대한 욕망과 문화적 허영심이 공존하던 곳이었던
셈이죠. 앞선 두 곳이 여유 있는 자들의
공간이었다면 맨 밑바닥에는 에일하우스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고된
하루를 버텨낸 이들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여관의 향긋한 요리
냄새나 태번의 고급스러운 와인 향기는 이곳에 없었습니다. 대신 눅눅하고
어두운 실내에 바닥에 깔린 지프라기의 썩은 그리고 시큼한 에일 냄새와 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곳은 대성당을 짓기 위해 돌을
날랐던 노동자, 몸에 벤 악취를 독한술로 씻어내려는 분인.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웃음을 파는 매춘부까지 도시에 가장 거친 인생들이 찾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들에게 위생이나 인테리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노동의 고통을 잠시남아 있게 해줄 갑싼
마취제였습니다. [음악] 문제는이 마취제가 퇴근 후에만 필요했던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해가 떠 있는 동안 즉 노동을 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마셨습니다. 1289년 베트레비 장원의 장부를
보면 당시 노동자들이 하루에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됐는지 적나라에
드러납니다. 짐꾼들의 일과는 음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로 호밀빵 치즈와 함께 A를 배급받았고 점심에는
생선이나 고기와 함께 더 많은 수를 받았으며 저녁 식사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퇴근하는 길에도 마시라고 A를 배급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하루 넷길를 술과 함께한 셈입니다.
사과 생산이 많은 영국 남부에서는 사이다가 지급되기도 했습니다.
서식스의 알리스턴 장원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매년 500런 약에
육박하는 사이다를 생산했습니다. 이것은 판매용이 아니라 오로지
일꾼들에게 연료로 공급하기 위한 물량이었습니다.
노팅의 기록 또한 놀랍습니다. 영주의 초원을 깎는 제초꾼들은 빵, 고기,
수프와 함께 A를 기본으로 제공받았는데 작업도 중에 A일이
떨어지면 추가 리필이 허용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빈도였습니다. 그들은
술통을 채우기 위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영주의 저택 안쪽을 무려 세
번이나 제집 드나들듯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오직 술 때문에 영주의 사유 공간이 개방된 셈입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집에 가서 마시라며 에일 양동이를
보너스로 챙겨 주었죠. 만취한 노동자들이 낮과 도끼를
휘두르면서도 생산성을 유지했다는 점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힘든
광경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술없이는 노동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술은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지역 경제를 순환시키는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교회 축제 때마다 열린 처치에 일이 대표적입니다.이는
일종의 기부금 모금 행사였습니다. 주민들이 맥주 재료를 기부하면
교회에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을 다시 돈을 내고 삼마시는 방식이었습니다.이
판매 수입금은 빈민 구제나 교회 수리에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신성해야 할 교회 묘지는 추객들의
남투국 현장으로 전락했고 계탄해야 할 성직자들마저 그 난장판의 주역이 되곤
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었던 랭엄 대주교는
격분했습니다. 그는 >> 이런 공동 음주에 참여하는 자는
누구든 파문하겠다.라는 >>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파문은 사형 선고나 다름 없었지만 결과적으로이 협박은 실패했습니다.
금지령이 무색하게도 당대 교구의 회계 장부에는 여전히 맥주 축제의 수입금이
교회 수입에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었죠.
중세 유럽인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났습니다. 산모가
산통을 시작하면 이웃들은 술을 들고 모여들었고 산모에게는 마더스코들이
처방되었습니다. 따뜻한 에일의 와인, 설탕, 향신료를 섞은이 혼합주는 당시
의학 수준에서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진통제이자 영양제였습니다.
또한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면 그 기쁨을 나누는 건 역시 술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출산을 도운 이웃 여성들과 산파를 위해 가십스 보울이라 불리는
커다란 술잔을 돌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세례식날
아버지는 세례식 A를 준비해야 했습니다.가 태어난 아기의 머리에
성수가 뿌려지는 동안 어른들의 목구멍에는 축하주가 뿌려져야만 했던
것이죠. 결혼식 역시 브라이드 에일이라 불리는 거대한
술판이었습니다. 신부가 직접 빚은 수를 하객들이 일부러 비싸게 사주는이
관습은 신혼 부부의 자립을 돕는 경제적 지원책이었으며 오늘날 결혼식을
뜻하는 단어 브라이달의 어원이 되기도 했죠. 물론 모든게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추기금을 걷기 위한 술강매가 빈번해져 법적 제재를
받거나 만취 상태로 확기매 맺은 결혼 서약 때문에 수송전이 벌어지는 총극도
비비제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인 장례식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319년 런던에서 치뤄진 윈체스터 주교의
장례식에서는 추무라는 명분 아래 무려 1100런의 에일이 소비되었고
유원장에 가난한 이들에게 내 돈으로 술을 배급하라고 명시하는 것은 고인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자손으로 통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거친 빵과 묽은 에일의 의존에 살아가던 유럽의 하칭민에게
14세기 중반 거대한 사건이 찾아옵니다. 바로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이 죽음의 병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음주문화의 황금기를 열어 주었습니다. 인구의 1이 증발하자
노동력은 귀해졌고 사람의 몸값은 천정 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가난한 하측민들의 식탁 풍경도 뒤바뀌었습니다. 물이나 버터 밀크로
목을 추이던 일들이 이제는 고급 A를 일상적으로 소비하게 되었고 숙련된
장인은 하루 일당만으로 질 좋은일 4겔런을 살 수 있었습니다.이는 이는
흑사병 이전 대비 무려 세 배나 오른 수치였죠. 당대 법률과 존 포트경은
달라진 세상의 풍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영국의 소장농들은 종교적 고행을 할 때가 아니라면 그 어떠한 [음악]
경우에도 물따인 마시지 않는다. >> 죽음이 휩쓸고 간 자리에 바야흐루
대음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 통제되지 않은 음주는 끔찍한 사고들로 이어졌습니다. 변사 사건을
전담 수사하던 검시관의 기록을 살펴보면 슬로인한 죽음들로
가득합니다. 당시 옥스퍼드의 성직자 존데 아콜은
만취 상태로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아 있다가 과일 깎던 칼을 손해 준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그대로 자신의
칼 위로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또한 런던에 거주하던 윌리엄은 한밤중 만취
상태로 실호로이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공동주택 계단 위에서 소변을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발을 헛겼고 그대로 계단 아래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런던의 더 모시스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아놀드와 존의 이야기입니다. 기분 좋게 시작된
친구와의 술자리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 감정이 격해진 아놀드가 존네 연인을 모욕했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격분한 조는 단검을 뽑아놀드를 바닥에 눕혀 제압했습니다.
하지만 승자는 없었습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아놀드가 숨겨둔 칼을 꺼내
위에서 누르고 있던 친구의 급소를 찔러 버린 것입니다. 우정도 이성도
알코이 만들어낸 광기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의 삶은 거대한 술통 속에 잠겨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술은 척박한 노동을 견디게 하는 연료였고 오염된 식수 대신 생존을
보장하는 생명수였으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경제적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그들은 폭력과 사고 그리고 통제 불능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그 시대의 역동성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대한 도피 혹은
알콜이 만들어낸 집단적 관광기에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 대신 맥주를 마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세인들이
에일 없이 그 혹독한 노동을 견딜 수 없었듯 우리 역시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티기 [음악] 힘든 시대를 살고 있죠. 그것이 씁쓸한
아메리카노이든 혀끝을 녹이는 달콤한 초콜릿이든 아니면 엄지 손가락으로
넘겨되는 자극적인 쇼치 영상이든 말이죠. 시대와 수단만 바뀌었을뿐
고통스러운 현실을 입기 위해 무언가에 취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음악] 부디 오늘 준비한 영상이 여러분들의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기분 좋은 에일 한잔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아연덱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