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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관찰자효과 | 부처와 예수가 깨달은 영원한 인생진리 / 깨달음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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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성장마인드셋 #마음공부 #오디오북 #영적성장 #깨달음 📖하기 책 내용의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나모리 가즈오 / 김윤경 번역 / 다산북스 {왓칭 1, 2}김상운 / 정신세계사 {성공의 카르마} 리즈 트란 / 쌤앤파커스 {끌어당김의 기적} 조셉머피 / 다산북스 {불멸의 지혜} 윌러스 델로이드 와틀즈 / 스노우폭스북스 복잡한 마음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초역 붓다의 말} 시라토리 하루히코 / 정은지 번역 / 빌리버튼 📢영상 자막에 오타가 있거나 음질이 약간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 부탁 드립니다~! 📢영상이 도움 되었다면 구독/좋아요/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깊은 감사드립니다^^
자막

인생은 예측할 수 없다. 누구도 앞나를 단정할 수 없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늘 행복을 바라고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돈이나 기쁨 하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히로에락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을 제안하면 마음은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만들어 낸다. 행복은 비교하지 않는 삶에 숨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옆에 한 사람만 있어도 비교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다. 그 마음은 끝없는 불만의 씨앗이 된다. 부정적인 걱정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하지만 방향을 바꾸면 걱정은 새로운

에너지가 되어 삶을 움직인다. 모든 차이는 어떻게 바라보느냐?

즉 내가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결과물일 뿐이다.

마음의 눈은 신성한 지혜와 다 있다. 모든 창조와 파괴의 시작점이 된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현실을 만들고 또한 사라지게

만든다. 모든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창조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몸이 깨어 있어도 마음이 잠들면

우리는 현실에 무감각해진다. 반대로 육신은 지쳐 있어도 영혼히

깨어 있으면 삶의 방향이 또렷해진다. 영혼히 깨어 있는 사람은 세상의

욕망에 무감각해진다. 반대로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끊임없이 외부를 쫓으며 진짜 자신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는 종종 관찰이라는 인간이 가진 신비로운 힘을 잊고 살아간다.

우주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그 가능성은 바라보는 눈을 통해서 즉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서 현실로 구현된다.

모든 사람에겐 잠재력이 있다. 능력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크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능이나 재능면에서 비슷한 출발선에 있다.

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그 한계를 돌파한다.

그들은 선천적인 천재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해부한 과학자들도

그가 특별한 뇌고조를 가졌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능력의 차이는 오직 자기 정의에 달려 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이 운명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에너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내가 몸에 갇힌 존재라고 믿는다면 그 한계를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우주의 일부이며 무한한 에너지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순간 가능성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형성된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서 현실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이 세상을

바라보면 그 안에 숨어 있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수천년 전 불교의 고승들은 생각을 멈추고 고유히 바라볼 때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렇게

말했다.이 말은 마음을 비워야만 천국을 마이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품고 있다. 천국은 멀리 있는 장수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그 고요한 내면에 존재한다.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치면 천국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마음속에 파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파도를 잔잔히 가라앉치는 것이

바로 삶의 평화를 찾는 방법이다. 미국 국립 과학 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약 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중 90%는 부정적이고 반복적인 생각들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20대 시절 고민했던 대부분의 생각들이 실제로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믿는

태도이다. 그러나 생각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등장하면 모든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 속에 갇혀서

현실을 왜곡하고 고통을 키우는 습관이 있다.

생각을 멈추고 그 생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진실의 문에 가까워질 수

있다. 진정한 나를 비춰주는 거울은 밖에

있지 않다. 내 안에 관찰자가 바로 그 거울이다.

그 관찰자는이 세상이 나를 외면한다고 해도 언제나 나를 품고 지켜보는

존재이다. 내가 유혹에 흔들릴 때 내면의

관찰자는 그러한 유혹을 알아차리고 놓아줄 수 있게 만든다.

어떤 문제도 그 관찰자의 눈으로 보면 그 안에 숨겨진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속의 관찰자는 우리로 하여금 더

넓은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도 관찰하는 행위를 통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된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는 말이다.

깊이 바라보면 깊은 변화가 생기고 약 바라보면 얕은 반응만이 돌아온다.

우주의 진리는 결국 바라보는 관점에 달려 있다.

생각이 얽히고 막힐 때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 순간 마음은 조금씩 맑아지고 원하는 현실의 단서가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존재의 근원에는 완전한 침묵이 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것을 제로 포인트 필드 혹은 영점

공간이라 부른다. 영점 공간이라 불리는 텅빈 의식의

상태에는 우리가 필요를 하는 모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를 그려가기 시작하면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로 구현된다. 의식이란 눈에 보이지 않은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텅빈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한한 정보로 가득차 있다. 무의 세계 0. 공간이라 불리는이

상태는 완전한 침묵과 비움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과 우리가 바라던 모든 응답이 담겨

있다. 생리학자 도로시 헌트 박사는 기에너지

연구의 선구자였다. 헌트 박사는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비우는 법을 훈련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그녀는 9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손을 짚고 거꾸로 설 수

있었으며 사람의 마음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텅비우는 순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천리밖을 내다보는 능력, 마음으로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 만리밖에서

마음으로 대어하는 능력, 이러한 숨어 있던 모든 능력이 깨어나게 됩니다.

그녀가 특별한 명상법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를 관찰하고 우주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육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면 그 한계를 절대 넘을 수 없다.

그러나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이며 영혼은 온 우주에 퍼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삶의 시한은 무한히 확장된다.

초고 성능 전자 현미경으로 뇌세포를 확대해 보면 수많은 섬유와 분자가

보인다. 그것을 더 확대하면 결국 허공이다.

우리의 육신 역시 대부분 빈 공간이다.

원자를 수백만 배 확대하면 보이는 것은 작은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이다. 나머지는 거의 모두 빈 공간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 모든 입자 역시 마찬가지다.

깊이 쪼개고 들여다 보면 텅빈 공간이다.

양자 물리학자인 울프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0.001%는 육신 속에 들어 있고 나머지

99.999%는 99%는 육신밖에 우주에 퍼져 있다.

즉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우리의 육체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반에 걸쳐서 확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절대 영도에서 미립자는 정지하지 않고 계속 진동한다.

빛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별빛은 수천

년 전에 출발한 것이다. 영혼의 진동도 그러하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진공 상태를 만들어도 그 안에선 여전히 미립자들이

살아 움직인다. 우리의 육신은 소멸해도 우리의 의식은

흔적으로 남는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 보이는

별빛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별이 남긴 흔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빛은 우리 눈에 보이며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러한 빛을 구성하는 것도 미립자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 역시 이러한 미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우주에 남아

흔적을 남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의 흐름이라

부르고 기독교에서는 심판의 기록이라 한다.

모든 행위는 우주의 기억 속에 저장된다.

오늘의 생각, 말, 행동이 미래를 구성하는 씨앗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업의 장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자각을 통해서 언제든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어떤 진동을 품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것은 에너지이며 언제나 다시 나에게 되돌아온다.

우주는 정확하게 반응한다. 그 어떤 위선도 통하지 않는다.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그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다.

해석이 바뀌면 진동이 바뀌고 진동이 바뀌면 현실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좋은 말을 하라. 항상 좋은 생각을 하라.

그리고 그 생각에 맞는 좋은 행동을 하라.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 되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지만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내가 무신고 품은 생각, 내가 혼잣 말처럼 내뱉는 말. 그 모든 것이

우주의 흐름 속에 전달된다. 누군가와 단 한 번의 인연이라도

맺었다면 그 사람과는 보이지 않는 정보 교류가 계속되게 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고 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감정을 오래 간직하느냐에 따라서 그 진동은

나를 통해서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우주에는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거대한

정보망이 존재한다.이 정보망은 인간이 숨기려 해도 감출 수

없는 내면의 진실까지 포착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했던 행동,

내가 몰래 감췄던 감정까지도 결국엔이 연결망을 통해서 모두 나에게

되돌아온다. 내가 뿌린 것은 결국엔 내가 거두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인과의 법칙이다.

선한 마음은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마음은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우주는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영혼은 그 모든 것을 저장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칭찬보다, 어떠한 성공보다 우리가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내면의 평화이다. 영혼의 파장이 맑아질수록 삶의 방향도

선명해진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업의 그물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정화하면 그 업의 흐름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진동한다. 그 진동은 말이 되기도 하고 표정이

되기도 하고 운명을 이끄는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선한 눈빛, 따뜻한 말투, 진심어린 행동은 모두가 그 사람의 영혼에서

나온 진동의 표현이다. 반대로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마음이 얼굴에, 말에, 삶의 궤적에, 고스란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당장 내 마음이 어떠한가를 점검해야 한다.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한 분노인지, 타인에 대한 질투인지 혹은 내 안의

상처인지 그 무엇이든 내가 품고 있는 것들이 현실을 만든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이든 그대로 내 미래를 만든다.

우주는 아주 정확하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이 보낸

에너지에 상응하는 결과를 받게 된다. 그러니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현실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이 삶의 모든

모습은 한 때 내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의 결과이다.

생각은 에너지이다. 보이지 않지만 그 생각의 힘은 물질을

움직이고 운명을 설계한다. 우리는 상상하는 존재이다.

상상은 미래를 그리는 붓이며 의지는 그 그림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를 자주 그려내는 사람은 그 그림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위는 우리가 반복해서 상상하는 것을 실제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반복될수록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은 행동이 되어 결과를 만들어

낸다. 만약 우리가 두려움을 상상하고 있다면

현실은 두려움의 모양을 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능성과 희망을 떠올리고 있다면 현실은 그 빛을

향해서 열리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라.

1000m 상공에서 자신의 삶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내가 머무는 공간, 도시, 대륙, 지구, 은하계가 차례로 작아지고 결국

원지처럼 사라지는 그 이미지를 그려보라.

그 광대한 우주를 바라보는 존재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자신이다. 이처럼 우리는 육신의 껍질을 넘어서서

상상이라는 통로를 통해 무한한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상상이 선명해질수록 그 이미지는 점점

실제처럼 다가오게 된다. 많은 이들이이 과정에서 영혼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움직이지

않지만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그런 실체로서의 자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상상이 현실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그러나 모든 현실의 처음은 상상에서

시작되었다. 상상이야말로 우주적 의식이 우리

안에서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상상은 그 본질에 연결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나는 어떤 방향으로 상상하고 있는가? 자주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목표가 명확할수록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길을 걷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내 목표와 연결된 단서에 더 쉽게 반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뇌의 필터링 시스템. 망상 활성기의 작용이다.

따라서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그것을 머릿속에 자주 떠올리고 실제로 이룬

것처럼 상상해야 한다. 이러한 상상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우리의 뇌는 그것을 실현 가능한 목표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부터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단서를 현실 속에서 찾아내기

시작한다. 상상은 단순한 꿈이 아니다.

우주가 응답하는 신호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먼저 상상했고 그

상상이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다. 그 계획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금 떠올리고 있는 생각이 미래의

우리가 된다. 생각을 관리한다는 것은 삶을 관리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뇌는 그 어떤 인공지능보다

똑똑하다. 우리의 뇌는 스스로 문제를 감지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아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이루고 싶은가? 그 질문이 명확하면 명확할수록 우리의

눈은 해답을 더 빠르게 찾아낼 것이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나 모든 진실은 마음의 눈에

있다. 삶의 깊은 의미, 운명의 흐름,

보이지 않는 인형과 기적은 영혼의 눈을 통해서만 인식된다.

영혼의 눈이란 관찰자의 눈이다. 깨어 있는 의식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명한 마음이다.이

눈이 열리면 세상의 고통은 단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내게 된다.

슬픔은 연민을 낳고 상처는 성장의 재료가 된다.

고통은 영혼을 맑게 한다. 영혼의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은 외부

상황보다 내면의 상태에 더 집중한다. 현실이 흔들려도 그 중심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영혼의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고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며 삶을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건들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모두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읽어내는 힘이 바로 영혼의

눈이다. 우리의 마음이 고유해질수록이 눈은

점점 선명하게 열린다. 부처가 말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으로 만들어지고 마음으로

형성된다. 영혼의 눈은 바로 그 마음의 중심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도 소중하게 여긴다.

자기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은 타인 역시 깊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인생은 영혼의 여정이다. 육신은 언젠가 소멸되지만 영혼은 그

여정을 통해서 더욱 밝아진다. 우리는 인생을 통해서 배우고 그

배움을 통해서 지나가고 있다. 영혼은 언제나 깨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고요하고 맑은 눈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듯 보이지만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이 세상이 기적

그 자체이다. 지금이 순간 의식의 초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 전체가 새롭게 태어난다.

우리는 지금이 순간에도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깨어남이다.

눈을 떠라. 그 눈을 떠라.

진짜 영혼의 눈을 떠라. 그리고이 세상을 다시 보라.

행복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순수한 바람이다.

그것이 종교의 목적이든 삶의 이유이든 결국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 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러므로 마음을 닫지 말고 어떤 조건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이다. 눈을 뜨는 것. 하지만 그 눈은

육체의 눈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짜로 떠야 하는 눈은 내면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다.이 눈은 신체 일부로 세상을 관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떨는 의식의 초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열리는 통로.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긴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자신의 내면과 존재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이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기 시작할

때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며

그저 그것을 자각하면 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이 세상을

당연하게 바라보며 살아왔다.이 세상은 고정된 실체라고 믿었고 내가

보는 그대로가 진실이라고 여겼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들리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제이며 들리지

않는 것이 진짜였다. 우리가 조용하게 멈춰설 수 있을 때

그때서야 들리는 소리, 그때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

우리는 멈춰서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멈추어 바라보는 자에게

먼저 다가오는 법이다. 예수는 말했다.

눈이 맑으면 온몸이 밝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두우리라. 눈이란 단지 보는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문이며 존재의 중심이다.

의식의 초점을 바꾸면 현실 전체가 바뀐다.

맑은 눈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고 어두운 눈은이 세상을 두려움과

외곡으로 보게 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지금까지 믿어왔던

현실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너머의 본질을 바라보는 일을 말한다.

물질적인 현실을 넘어 비물질적인 인식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믿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 깨진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가 열린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고 진짜 삶이 시작되게 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느낌은 내면의 부제가 아니라 인식의 망각이다.

진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잊었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얻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는 것이다.

존재는 언제나 완전했으며 모든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데 있었다.

부처는 말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우리가 겪는 현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사람, 우리가 자주 반복하는

패턴들.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 마음이라는 거대한 우주에서

흘러나온다. 그 마음이 투사한 이미지들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질 뿐이다. 마음이란 단지 감정이 아니다.

창조의 시작점이며 우주와 연결된 핵심이다.

그러나 인간은이 지상에서 태어나면서 본래의 기억을 잊었다.

기독교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르고 불교는 무명이라고 부른다.

무명 즉 어두움.

무명은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앎이 없는 마음이다.

이쯤에서 비롯된 고통인 것이다. 불교의 12연기에서 무명은 모든

고통의 시작이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갈망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집착한다. 그 집착이 결국 괴로움 고를 낳는다.

모든 고통은 진리를 모르는 데서 미롯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꾸 밖을 본다. 누가 나를 구원해 줄까?

도대체 어디에 해답이 있을까? 그 모든 해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내 면을 외면하는 진짜 구원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

오직 나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자기 내면으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탐색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수렴한다. 내가 찾고 있던 해답은 원래 나였다.

고통의 원인도 자유의 열쇠도 모두 내 안에 있었다.

삶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있던 날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본래의 자아를 진짜 나를 기억하기 위해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기억은 흐릿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삶의 갈린길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 기억은 조용히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 부르거나

예감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원추적 진실의 흔적이다.

중국 철학에서 말하는 돈은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도가 물질이라는 옷을 입고

사람이라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돈은 움직임 이전의 움직임이며 존재

이전에 존재이다. 우리의 본질은 바로 그 도와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측정할 수

없지만 느껴지는 것. 진정한 나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이다. 파동이며 의식이다.

그 본질은 생각이라는 통로를 통해서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은 파동이다. 말도 파동이다.

감정 역시 에너지의 진동이다.이 모든 것은 양자 물리학이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말은 강력한 주문이다.

우리의 감정은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는 파장을 만든다.

잠재 의식은 말이나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들여서 현실로 응답할 뿐이다.

그렇게 받은 응답이 지금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었다.

생각, 말, 감정.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보내고 있는

주파수이다. 그리고 그 주파수가 같은 진동을 가진

현실을 끌어당긴다. 우주는 정말 단순하다.

주는 그대로 돌려 준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말한 그대로 될 것이다. 부처는 말했다.

그대가 오늘 하는 말이 내일의 삶을 결정짓는다.

무신고 뱉던 말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왔는가?

지금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지금 품고 있는 감정이 내 일의 경험을 결정한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생각을 반복할 것인가?

우주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물질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같다.

모든 고체는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우리의 생각 또한이 에너지에 영향을

준다. 파동은 같은 파동을 끌어당긴다.

진동수는 같은 진동수를 알아본다.이 말은 물리학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진실이다. 마치 같은 주파수끼이 공명하듯이

우리가 내보낸 에너지는 반드시 그와 비슷한 에너지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생각은 에너지를 설정하고 그 에너지가 현실을 구성한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자주 반복하는 이미지 감정적으로 자주 반응하는

패턴들이 곧 인생이라는 무대의 장면을 바꾸는 스크립트가 된다.

잠재 의식은 우리가 반복한 것을 신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반복이 중요한 것이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은 파동이 되어 현실을 경고하게 만든다.

같은 감정, 같은 말, 같은 태도가 나를 같은 현실로 고정시키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서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먼저 에너지의 진동을

바꿔 주어야 한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말과 억누르는

가르침에는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를 밝혀주지 않는 에너지에는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어떤 현실을 반복하고 있는가? 그 반복은 익숙함이 아니라 무의식의

습관일 수 있다. 그 습관을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현실은 시작되지 않는다. 창조는 절대적인 하나가 스스로를

나누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 나눔 속에서 우리가 탄생하였고

양극성의 세계에서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우주의 리듬은 대칭과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금과 양, 시작과 끝, 낮과 밤, 탄생과 죽음.이

이 모든 것들은 서로를 전제로 존재한다.

모든 대조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대립이 아닌 상보적 균형 속에서

우주는 살아 움직인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하고 기쁨은

슬픔이 있어야 빛난다. 성공은 실패가 있기에 존재한다.

두려움 없는 도전은 존재하지 않으며 실패 없이는 성장 또한 없다.

실패는 중착점이 아니라 성공으로 이어지는 연결이다.

실패한 사람은 도전한 사람이고 도전한 사람만이 진짜 성장을 맛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실패할 때 어떤 마음을 품느냐이다.

부처는 말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다.

삶이 가장 막막하고 깜깜해질 때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두려움 대신 침착함을 선택하고 조급함

대신 흐름을 믿을 때 모든 조화가 다시 시작된다.

실패의 순간에 두려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믿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두려움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택할 것인가? 두려움은 현실을 왜곡시키고 믿음은

현실을 다시 세운다. 믿음은 현실을 만드는 구조이자 들이며

우리 인생을 받쳐 주는 내면의 기반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반드시 올라온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르지 말고 포용하고

정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반대의 감정도 결국 나를 위한

도구이다. 문제나 갈등이 없다면 내면의 힘도 알

수 없다. 모든 폭풍은 지나간다.

중요한 것은 그 폭풍 속에서 어떤 자세로서 있는가이다.

모든 어둠은 결국 빛을 만나 사라진다.이

진리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지금이 순간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에너지가 지금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감정, 지금의 말, 지금의 선택은 그 자체로 미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늘 지금이라는 문을 통해서

다음 현실로 진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지금

깨어 있기 바로 이것이다. 부처는 말했다.

지금이 순간 깨어 있는 자만이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다.

깨어 있는 자는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 선택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의 내 의면의 기준으로

외부를 재고상한다. 지금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은 미래의

시작점이다. 기도란 내면의 감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감사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는 고주파 에너지이다. 내면을 향한 기도는 운명을 바꾼다.

감사하는 순간 부족함에서 풍요로 전환된다.

감사의 감정은 감사할 일을 끌어오고 두려움은 불안한 현실을 끌어온다.

감사한다는 건 이미 받았음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과 사랑, 기쁨과 풍요는 언제나 나를 관통하고 있다.

그것을 믿는 순간 현실은 달라진다. 예수는 말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마음의 평안이 임하리라.

감사는 지금 여기서 이미 충분하다고 선언하는 힘이다.

그리고 우주는 그 선언을 현실로 나타내 준다.

자연은 늘 회복과 균형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어두울 수도 없고 영원히 아플 수도 없다.이

흐름을 신뢰하는 것이 곧 믿음이다.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순간에도 햇살은

다시 비춘다. 그리고 그 햇살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서부터 솟아나온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단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을 향한

여정이라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삶의 동기가 변하면 삶의 구조도 변한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이며 진동의

법칙이다. 지금부터 나는 내 삶을 다시

정의한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두려움에 끌려가지

않고 내가 선택한 중심으로 걸어간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의 기대 속에서

살지 않는다. 내 안에 진실과 함께 나아간다.

나는 창조자이며 선택하는 자이다. 존재는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창조에 나가는 것이다.

나는 충분하며 이미 깨어나고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전혀 다른 차원에

나를 만난다. 믿기지 않는 기적은 바로 마음에서

시작된다. 현실은 언제나 감정의 방향을 따르고

믿음은 그 문을 활짝 열어 준다.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품으면 그

진동이 현실을 왜곡하고 긍정적인 감정은 삶을 확장시킨다.

감정이 모든 것을 이끌고 있다. 나는 지금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두려움을 버리고 기쁨을 선택한다. 실패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끌려가지

않으며 매 순간의 선택으로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성공의 카르마를 쌓고 있다.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에너지로 저장되며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온다.

나는 이미 변화할 준비를 끝냈다. 이제 진정한 내가 깨어날 시간이다.

이제 진짜 내가 깨어난다. 인생은 길고도 짧습니다.

눈을 뜨면 어제와 닮은 오늘이 이어지고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듯한 하루가 지나갑니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어떤 방향을 찾아 헤니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누군가는 마음의 평화를, 누군가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갈망의 바탕에는 한 가지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인생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이 땅을 밟았으며 무엇을 남기고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질문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의 문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지를 밝히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를 아는 일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해부하고 마음을 비추어 진짜 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은 무언가를 얻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좋은 직자, 명예, 돈, 명성. 그러나 그 성공이 진정한 성취감을

주는 일은 드니다. 왜냐하면 그 성공은 바깥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안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이르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속의 성공은 더덮는 그림자와 같으니

그것에 매달리는 자는 자신을 잃는다. 성공이란 결국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성공은 그냥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수천 명을 이끄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 성공이 진짜가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기 내면의 진리와 끊어지지 않는

영렬입니다. 인생이란 흐름입니다.

그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를 과거로 끌어당기고 미래로 밀어냅니다.

우리는 놓친 귀에 대한 후회와 오제하는 내일에 대한 불안 사이에서

자주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도 진리는

언제나 한 자리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삶은 지금 여기에만 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것이다. 행복도 평화도 진리도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이 순간 안에만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왜 실패했는지, 왜 나만 고통스러운지,

왜 그토록 간절한 사랑이 떠났는지, 도대체 왜 내가 가는 길이 이렇게

막막하기만 한지, 그러나 인생이 가르쳐 주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질문을 품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답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더

겸손해집니다. 답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경험하고 모르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진리를 향한 갈망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진리는 스스로 찾는 자에게만

열린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같은 방향을 가르킵니다.

진리는 외워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찾고 경험으로 부딪히고 고유 속에서 직접 열어야

하는 문입니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넘어집니다. 후회하고 자신조차 용서하기 어려운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는 자격이 없어. 내가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나를 과연 누가 받아 줄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한

법이다. 나는 이미 의로운 사람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넘어진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삶이 지친 이들을 부르기

위해 온 것이다. 예수님의이 말씀은 우리가 완벽할 때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지 말고 연약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마음은 오히려 진리 앞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완벽함을 찾지 말고 진실함으로 나아오너라.

진리는 완성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이 자리에서 고통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옵니다. 우리는 평생 나라는 존재를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일어내야 할 목표, 내가 견뎌야 할 고통.

하지만 그러한 나는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내가 생각하는 나, 사람들이 보는 나,이 사회가 기대하고 있는 나.이

이 모든 것이 실제로는 계속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어릴적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지

않습니다. 기억은 흐릿하고 감정도 변하고 몸도

점점 변해 갑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도 감정도 생각도 의지조차도 나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존재의 중심이라 믿었던 나는 실상

수많은 요소들이 잠시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르라.이

말씀은 자기를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거짓된 자아를 하나씩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을 역할로만 규정합니다.

직업, 학력, 사회적 지위, 가족 관계.

하지만이 모든 것은 삶의 껍질 뿐입니다.

진정한 자아는 그 껍질 너머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사실 자아가 무너질 때 생깁니다.

인정받지 못했을 때, 모욕을 당했을 때, 비교를 할 때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만약 그 내가 실제가 아닌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란 환상이다.

그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더 큰 뜻, 더 큰 진리. 자신을

넘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놓는다는 것. 그것이 결코 무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것과 연결된 온전한 존재로 깨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과 맞서 싸우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생명 전체와 함께 숨쉬는 하나의 흐름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며 존재한다.

하나가 없으면 나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여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이 두 분의 가르침은 우리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온 우주의 일부 생명과 진리와 사랑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그 흐름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씩 놓아 주는 것입니다.

욕심을 놓고 집착을 놓고 타인과의 비교도 놓고 열등감도 놓고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마저도 천천히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득찬 자는 배울 수 없고 비운

자만이 지혜를 담는다. 기음은 포기가 아닙니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방심만을 고집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상황과 만남

속에서 진리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수많은 기회를 줍니다.

실패라는 이름의 기회, 시련이라는 이름의 기회,

질병이라는 이름의 기회. 심지어 상실이라는 고통마저도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끌기 위한 진리의 문이 됩니다.

그 문을 통과할 때 우리는 삶을 다르게 보게 됩니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중요해지죠.

얼마나 인정받았는가보다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가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것은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그 베품은 물질을 나누는 것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이해와 용서와 자비를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누군가의 한마디

따뜻한 말로 살아난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 기억을 이제는 우리가 다른 이에게 만들어 줄 차례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이 순간 여러분의 숨결 속에 여러분의 양심 속에 여러분의

침묵 속에 조용히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들을만큼 고유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진리는 소리내어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자에게 속삭인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밖에 소음을 잠시 멈추고 안에 진실에

귀를 기울일 때 삶의 진짜 의미가 천천히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단 한 번 분인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어떤 결말로 끝낼지는 지금 여러분의 선택이 달려 있습니다.

무엇을 따르시겠습니까? 두려움인가요?

진리인가요? 집착인가요?

아니면 사랑입니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존재는 진리를 향해 흐르고 있다.

다만 눈을 감은 자는 그 흐름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이요 진리요 길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삶의 끝에서 우리가 도달할 진리는 어쩌면 늘 우리 안에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잊고 살아온 것일 뿐입니다.

이제는 기억할 시간입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고 예수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안에 진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락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라지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고통으로 화한다.

술에, 음악에, 음식에 취하는 것이 그렇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안락은 이와는 다르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몸이 받아들이는 일체의 감각을 잘라냄으로써 비로서

안락을 얻는다.이 안락은 쾌락도 고통도 아니다.이 이

안락은 한점 바람에 흔들리기는 커녕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철저한 무의 세계이다. 어떻게 해야 파도치는이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칠 수 있을까? 이미 수천 년 전에이 질문에 답을

낸가 있었다. 고타마 시타르타.

바로 붓다이다. 붓다는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어도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 지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붓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면 나의 언어로

해석한 나만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초역 붙다의 말.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물과 현상이

아름다운지 추한지 분쟁을 일으키는 불씨인지 그렇지 않은지 큰 문제로

번질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 앞으로 당신을 괴롭힐지 아니면 달콤한 기쁨을

줄지.이 이 모든 것은 오직 당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

망상과 집착을 버려도 사는 동안 많은 일을 보고 듣게 된다.

눈으로 들어온 것은 눈에만 머물게 하라.

눈으로 들어온 것에 마음과 감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귀로 들어온 것은 귀에만 머물게 하라.

그러면 이것들이 마음속으로 들어가 고통과 법민의 씨앗이 될 일은

없으리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진지한 눈으로 들여다보라. 마음을 어디에 빼앗기고 있는지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 어떤 감정에 물들어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라.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

세속적인 근심은 없는지 세속적인 탐욕은 없는지

조용히 들여다보라. 아무것도 없다면 마음도 없다.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을 없애고 홀가분해지라.

고요함을 즐기라. 아무것도 마음에 담지 말고 그저 그

시간에 당신을 맡기라. 그러면 모든 후회와 근심, 걱정,

고통이 사라진다. 낮도 밤도 그리고 당신 자신조차도

고요하게 만들라. 그 풍성한 시간을 즐기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세상 끝까지 뛰는 것이다.

걸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곳에서 온 힘을 다해 뛰라.

세상 끝까지 뛰어서 끝내 세상을 멈추게 하고 사라지게 하라.

세상의 끝은 열반의 경지이다. 완벽한 정숙함과 투명함으로 가득한

세상의 끝을 향해 뛰라. 우울하거나 마음이 다혀 있으면 절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일에도 치물해져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반추하고 끙끙거리며 후회해서는

안 된다. 반성과 후회 또한 깨달음을 방해하는

허무한 집착일 뿐이다. 후회하지 말라.

현재를 살라. 고통을 초래하는 집착을 벗어던지는

길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것. 현재에 만족하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 미래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일체 갖지 않는 것. 계율과 해탈마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것. 그저 지금의 평온에 만족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면 늙검도 죽음도 사라진다.

그리운 것, 오래된 것을 애지중제하고 반기지 말라.

새로운 것에 매료되거나 눈을 반짝이지 말라.

사라져 가는 일체의 것을 아까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라.

슬퍼하거나 개탄하지 말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동유하지 말라.

뭔가 마음이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러면 고통의 원인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지

보인다. 늙고 젊음은 결국 망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리라. 지금까지의 인식을 모조히 바꾸라.

그때 비로서 젊고 늙음, 있고 없음 같은 모든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세월의 흐름에서 벗어나리라.

진정한 명상이란 일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조차 떠올려서는 안 된다. 깊은 명상에 심취하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진정한 자아가 보인다.

인생의 최악은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첩첩 산중에 둘러싸여 있는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가?

몸을 가누기 힘든 시련으로 고통받고 있는가?이

모든 것은 당신 마음이 행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으라.

증우심에 휩싸여 상대를 공격하는 행동.

원한과 시기심에 상대방을 저주하는 행동. 그 어떤 행동도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보다 심하지 않음을 깨달으라.

먼저 자기 자신을 가다듬으라. 소도를 만드는 사람은 고생 끝에

산에서 강으로 물줄기를 끌어온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나무을 깎고

연마하고 모양을 가듬는다. 집을 짓는 사람은 나무를 베고

조립하고 경고하게 벽을 만든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당신 자신을 가다듬으라. 몸가짐을 마음가짐을 가다듬으라.

그곳에 있는 것은 당신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을 지금이 상태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혼탁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추악함은 탁한 마음에서 싹을 튀워 결국 당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놓는다.

마음이 느끼는 감정에 일일이 구해받지 말라.

신체가 느끼는 감각에 일일히 신경 쓰지 말라.

당신의 마음과 감각을 능숙하게 다루라.

마음의 소유를 잠재우라.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편안하게 잠들 수 없다. 슬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치지 못하면

언제까지도 편안히 쉴 수 없다. 마음의 소유를 잠재우지 못하면

평정심을 찾지 못하면 하찮고 어리석은 일에 매일 휘둘리게 된다.

언제까지 이런 불안한 삶을 살 것인가?

타인에게 험담을 들어도 흔들리지 말라.

칭찬을 받아도 자만하거나 못줄하지 말라.

그 순간 교만이 당신을 진흙탕 속으로 밀치리라.

흔들리지 말고 의연하게 나아가라.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라.

험담도 칭찬도 돌같이 여기라. 비난하는 자, 칭찬하는 자, 시기하는

자.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말라.

동요하지 말라. 들뜨는 마음조차 품지 말라.

바위와 같은 영혼을 가지라. 마음이 일으키는 소유를 말로 풀어내지

마라. 말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지 말라.

고통이 있으면 기쁨도 있는 법. 바위처럼 웅묵히 마음을 다스려라.

늘 가슴에 바위를 품고 살라. 자기 자신을 잘 관찰해 보라.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에 휩싸 있는지 진지하게

관찰해 보라. 만약 마음이 욕망과 근심에 쌓여

있다면 버리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 금강석을 연마하면 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인간은 다르다. 마음이 탁할 대로 탁해진 인간을

연마한다고 해서 깨끗한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깨끗해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타인이 당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누구의 지시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주인이 명했는가?

고용주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가? 세상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있지는

않은가? 주인공으로 살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결정해

왔는지 돌아보라. 그 삶이 정말로 당신 것인가?

그저 자신의 욕망이 휘둘리고 있지는 않은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에게 주인 자리를 내어주고 꼭두각씨가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 인생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던가?

당신 인생인데 왜 당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는가?

자신의 삶을 살라. 주인공으로 살라.

인생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가?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는가?

삶이 잠들지 못하는 자의 긴밤처럼 느껴지는가?

피곤해 지친 자의 고행길과 같다고 생각하는가?

아돈난 자일수록 인생의 여정이 길고 험한 법이다.

현명해지라. 인생이 고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고독을 즐기라. 현명한 자는 모두 고독을 즐긴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말라. 흉내내지도 매달리지도 말라.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그곳에 법도가 있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은 알고 있는

법도의 참모습이 있다. 깨달음의 경제에 이르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진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는 관념조차 사라진다. 그럼에도 붙다가 내가 말하거늘 이렇게

말한 것은 그저 의미를 쉽게 풀어 설명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붙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재산이 내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에서 번뇌는 시작된다.

아이가 내 아이라고 여기는 마음에서 번뇌는 시작된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왜 그것이 왜 그 아이가 당신

것인가? 당신 자신조차 당신 것이 아니거늘

깨달음을 위한 세 가지 처방은 이것이다.

말할 때는 진실만을 입에 담아라. 비록 빈곤해지더라도 베푸는데에

힘쓰라. 타인에게 자신에게 절대 화내지

말라.이 세 가지를 늘 실천하라.

그러면 비로서 속세에서 벗어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