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늘 베드로를 향해 물으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이
질문이 16 번에 걸쳐서 우리에게 질문하신
예수님의 질문과 그의 대답했던 우리의 대답의 마지막 마태마가 누가 요한복음
마지막 책인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물으셨던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Do
you love me?라고 라고 하는이 질문이
굉장히 우리에게 깊고 무겁게 다가오고 우리도이 질문 앞에 고민을 하면서
무겁게 대답해야 할 대답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을 끊임없이
사랑해 주기만 했던 분이 어느 날 되려 여러분의 눈을 보면서
당신은 날 사랑하냐고 물을 때에는 농담으로 대답하면 안 되고 진심으로
대답해 줘야 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주기만 하는 사랑의 대표적인
분이 부모님이지요. 그니까 부모님은 자녀를
출산하고 키워서 출가시킨 이후에 끝까지 사랑한다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하는 분이 부모일 겁니다. 아침에 아이가 처음 학교를 등교할 때도 보를
부비면서 엄마가 너 사랑해, 아빠가 사랑해. 끝도 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사랑을 주기만 했던 부모님이 어느 날 문득 여러분의 눈을
보면서 근데 넌 나를 사랑하니라고 물으면 아유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냐고 알면서 그러냐고라고 대답하면 안 되고 사랑을 주기만 했던 분이
어느 날 사랑하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때는 조금 어색하더라도
진심어리게 사랑한다고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묻는 거니까 대답해 드려야
하죠. 여러분, 부부가 같이 사랑을 해서
만나 살아도 사랑이 똑같지 않습니다. 희한하게 하나님은 한쪽 사람이 한쪽
사람을 더 사랑하도록 해서 사랑을 이어가게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분명히
더 희생하고 더 사랑해 주는 배우자가 있습니다.
사랑을 하기만 해서 사랑받는데 익숙해진 나에게 배우자가 어느 날
정색을 하면서 근데 당신은 나 사랑하냐고 물을 때는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아유 그걸 질문이라고 해. 아, 바빠 이러고 가면 안 되고.
아, 알면서 갑자기 그렇게 어색하게 질문을 하냐라고도 대답하지 마시고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냐고 박지르지도 마시고 그렇게 물어볼 때는
대답을 해 줘야 됩니다. 내가 당신 사랑해라고
어색하더라도 진심으로 얘기를 해 줘야 되죠. 물론 남자들은 갑자기 어느 날
아내가 당신 나 사랑하냐 그러면 굉장히 무섭기는 합니다. 뭐가
들켰나? 그래서 그 질문이 너무 두렵기는
하지만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왜냐면 그 말이 듣고 싶어서 묻는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예수님은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기만 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심지어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사랑의 제수가 뭐죠?
너희를 이만큼 사랑해. 이러고는 팔을 쫙 벌려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죽으신 예수님이 만약에 사랑을 주기만 하던 그분이
어느 날 되으시면서 돌이켜 우리에게 근데 너는 나를 사랑하냐라고 물으실
때는 우리도 진지하게 대답을 해야 됩니다. 예. 주님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해야 되는 거지요. 오늘 베드로와
예수님이 부활 후에 예수님께 죄송하고 자기에게 실망하여
옛사람인 고기잡이로 갈릴리로 떠났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장면입니다.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이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을 물으셔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이렇게 질문을 하실 때 베드로가
대답은 했지만 가볍게 대답을 합니다. 아 그거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예.
주님 사랑합니다. 끝이 나야 되는데 예수님이 두 번째
묻습니다. 다시 물어볼게. 너 나 사랑하냐? 똑같이 가볍게 대답합니다.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님이 더 잘 아십니다. 끝나야 되는데
예수님이 또 세 번째 물으십니다. 아니 다시 대답해 봐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물으실 때는 가볍게 대답할 수가 없어서
돌아보게 됩니다. 왜 내가 두 번이나 대답했는데 물어보시지.
그럼 내 사랑의 고백이 뭔가 잘못되었나? 나는 정말이 고백을 할
자격이 있나? 내 속에서 정말 사랑이라는 것이 있는가?
자기의 사랑을 진심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드는
거지요. 예수님이 세 번 물으셨다는 거는 우리 한국말로 세 번 영어로
쓰리 타임스가 아니라 여기서 세 번이라고 하는 거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완전 숫자입니다. 그래서 3위체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거고 예수님이
3일간 무덤에 계신 건 완전한 죽음을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세
번을 물으셨다는 것은 단지 숫자적으로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진심을 다해
물으셨다는 거예요. 진짜네 사랑을 꺼내 봐라. 진짜네 사랑으로 나를
고백해 봐라.라고 말씀을 첫 번째 대충 대답하고 두 번째 대충 대답하는
그에게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다시 물으니까 베드로가 그 의미를 알고
고민을 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
1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심으로 베드로가 뭐 해요? 근심하여 이르되
여기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대로 바로 넘어가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근심하는 척 하다가 예,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게
아니라이 새벽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이 묻는 질문 앞에 세 번째
대답을 해야 되는 베드로가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근심하여 하고는 침묵이 한참 흘러야 됩니다. 짧게 근심하면 안 됩니다.
길게 근심하고 난 뒤에 대답이 이루대가 나와야 돼요. 그 근심은
뭡니까? 왜 물으시지? 두 번이나 대답했는데
내가 진짜 주님을 사랑한다고 이제는 진심을 꺼내 놔야 되는데 내 진심은
뭐지? 내가 정말 주님 사랑한다고 입으로는 고백해도 내 마음으로 진짜
사랑하는가? 많은 고민을 한 다음에 그 결론으로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주님 나 아시잖아요.
주님 사랑하는 것도 알고 주님 배반했던 것도 알고 제가 모자한 것도
알고 주님 향한 뜨거운 마음도 알고 어떨 때는 칼을 빼서 말고 귀를 베는
열정이 있는가면 어늘 때 여자 앞에서 주님 모른다고 배신하면서 제가 얼마나
모자하고 부족한 사람인 줄이 더 잘 아시기 때문에
고민이 되지만 그래도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던이 진정 정어린 고백. 오늘이
내용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드로 즉
우리에게 물으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을까?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 베드로에게 왜 네가 나 네가 진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첫 번째 이유는 베드로를 회복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질문. 자.
오늘이 갈릴리 호수에 베드로를 찾아오실 때는이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아주 큰 사건이 있은 뒤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었냐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엄청난 사건이 있었지만 베드로
자신에게는 그날이 있었던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충격적인
자기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웠던 사건이 있었던 겁니다. 왜냐면 바로
한 여자아이 앞에서 새벽역에 모닥불 앞에서 내가 예수를 모른다. 난 절대
모른다. 아, 나는 그런 사람 알지도 못한다. 부인했던 그 부인 한 네,
다섯 시간 전에는 예수님 앞에 이렇게 말했거든요. 예수님 이렇게 사람이
많아도요. 다 예수님 버려도 나는 안 버립니다라고 호원 장담했던 그가
불과네 다섯 시간 만에 예수님을 모린다고 부인을 하자
너무나도 자기의 그 입술이 가벼운 거예요.
너무 자기에게 실망을 한 거예요. 밤에는 주님 사랑한다고 다 버려도 안
버린다고 혼 장담하던 입이네 다섯 시간 만에 한 여자의 앞에서도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는이 입술을 가지고 내가 무슨 주님의 복음을
전한단 말인가? 나 같은 놈이 무슨 주의 일을 한단 말인가? 아 맞아.
나 어부였지. 고기 잡고 사는게 딱 맞아. 내 인생
한평 거룩배에 담아서 고기 많이 올라오면 기뻐하고 안 올라오면은
슬퍼하면 안해서 살다가 죽는 거야 하고 옛사람으로 돌아가고 입을 닫아
버렸습니다. 자기의 입은 쓸모없는 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입을 닫고 마음을 닫아 주님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베드로를 포기할 수 없는 한 분 있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야, 너는 내가 포기되냐? 나는 네가 포이 안 되던데
하고 찾아오시지요. 그리고는 똑같은 예수님 모른다고 했던
새벽 시간에 찾아오셔서 모닥불을 피우는 그 앞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질문할테니까 대답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지금 예수님이 뭘 하고
계시는 거죠? 나는 그를 모른다. 그를 모른다. 그를 모른다. 부인했던
그 가볍기 짝이 없는 그의 입을 다시 그래서 입을 닫아버렸던 그의 입을
열고 계시는 거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억지로라도 고백하게 함으로 상처를 꿰매어 주고 계시는 거죠.
오늘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서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은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마음에
난 상처를 꿰매어 주기 위해서 다시 질문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는요.
주님의 일을 하다가 스스로에게 상처를 받거나
같은 성도에게 상처를 받거나 목회자에게 그렇거나 아니면 하나님에게
상처를 받거나 그래서 입을 닫아 버린 성도들을 많이
봅니다. 그렇게 밝게 그렇게 오면 먼저
뛰어가서 인사하고 먼저 이렇게 수다장이처럼 간증을
늘어놓고 찬양도 그렇게 은혜롭게 하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입을 닫아 버리는 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실호증에
걸린 사람처럼 입이 다친게 아니라 지나고 보니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이죠. 교회는 나와서 앉아 있지만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아무에게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마음이 꽉 막혀서 마음만 다친 줄 알았더니 마음 다치니 귀도 다쳐서
앉아 있는데 설교를 못 들어요. 안 들려요.
입을 닫아 버리니까 앉아는 있는데 참 하나님 무서워서 예배는 못 나올 수는
없고 나와 앉아 있지만 하나님께서운하니까 하나님께 입을 닫아
버린 사람도 있어요. 기도를 안 해요. 하나님께 입을 닫은 거지.
찬양하자. 그래도 찬양을 안 해요. 하나님께 입을 닫아 버린 겁니다.
신앙생활하다가 하나님께 상처받을 때가 있고 내가 나에게 실망할 때가 있고
남에게 실망할 때가 있어서 제일 먼저 입을 닫아 버리고 아 이제 아무 말도
안 해야지. 입을 닫아버려서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고 사람에게 격려하든지 사랑을 간증하지도 않고 마음도 닫아버리고
귀도 닫아버리고 눈도 닫아버리고 입도 닫아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오늘이 중에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이부 예배에
앉아 계시다면 오늘 주님이 그분을 찾아가셔서
이렇게 물으실 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 앞에 입을 열어야 합니다.
입이 열리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 주님이 보이고 다시 설교가 들리고 다시 입에서
찬송이 나오고 멈췄던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입을 꽉 닫아버린 이놈의 입 아무래도 쓸모 없는 입 베드로가
예수님 그렇게 사랑하고 다 버려도 나는 안 버린다고 혼 장담했던이
입이네 다섯 시간 만에 나는 그를 모른다고
싹 바뀌어 버린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
닫아버리고 사는게 낫지.이 이 주둥이로 무슨 주의 일을 한다고
복음을 전한단 말인가 하고 입을 닫아 버리고 옛사람으로 돌아갔던 그를
찾아와서 주님이 다시 그 입을 열게 하시는 거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빨리 말해라. 주님 사랑합니다. 다시 묻는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입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빨리 말해라. 주님 사랑합니다.
다시 묻는다. 대답해라. 네가 날 사랑하느냐? 예수님 다 아시잖아요.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주님 사랑합니다.
그렇게 다시 입을 열게 하신 주님.
오늘 여러분의 마음이 다치고 입이 다치고 무슨 상처 때문에 누구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 하나님께조차 받쳐 있는 마음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 주님 사랑합니다라는 그 고백에 여러분의 영혼의 창문이 열리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물어보신 첫 번째 이유는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물으셨다면 두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 이유는 뭐냐면은 사역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물어보신 겁니다. 무슨
말이냐? 오늘 베드로를 찾아오신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목적이 뭔지
15절, 16절, 17절에 세 번에 질문 다음에 사랑하느냐 물어보시고
사랑합니다 대답한 다음에 똑같이 대답하신게 뭐냐면 그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베드로를 찾아오신 이유는 양을 목양하라고 맡기기 위해 오신 거지요.
사역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거예요. 뭐 주일학교 선생님이면 학생들을
맡긴다든지 목자이면 목원을 맡긴다든지 뭐 어떤 사역을 맡기기 위해서 저
외국인 근로자를 맡기 위해서 누구를 맡기기 위해서 저도의 영혼을 맡기
위해서 주님이 양을 맡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오늘이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은
사역을 맡기 위해서 오셨다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베드로야, 내가 널 찾아온 이유는이 양들을 목양하고 맡아 주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네가 목양을 잘하려면 이렇게 해야 되고 저렇게
해야 되고 하는 목양하는 법, 사역하는 법 베이직 원투쓰를 가르쳐야
되는데 사역을 맡기러 오신 주님이 사역 얘기는 일도 안 하시고 무슨
말을 하시냐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시거든.
아니, 사역하는 법을 가르쳐 주셔야지. 사역을 맡기러 오셨으면.
왜 사역하는 법은 안 가르쳐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가?
그래서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대답했더니만 그럼 사역 이렇게 해라고
말도 안 하시고 바로 그럼 사역해라고 말씀하셔요.
왜 그랬을까요? 사역을 맡기러 오신 주님이 사역
얘기는 하나도 안 하시고 왜 사랑하냐고 물어보신 다음에 사랑한다고
하니까 바로 사역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사역보다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인 거죠. 사역을 먼저 사랑하지 말고
나 예수를 먼저 사랑하라는 의미지요. 사역을 사랑해서는 사역할 수 없지만
나를 사랑하는 자는 사역을 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
여러분 교회에 오면은 이것저것 다 무슨 사역이라도 하나 맡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찬양대가 찬양을 하듯이 오케스트라를 하든지
예배 안내를 하든지 무슨 사역을 해도 다 하게 돼 있어요. 지금이 시간에도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들이 지금 저렇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사역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누구나 사역을 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역을 열심히
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고 그 사역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역을
사랑하다 못해 집착하는 사람 이제는 예수님이이 꽃구가 별로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생명을 걸다가 집착하다가 오히려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그것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님이 너 사역을 사랑하냐고 물은 적이
없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셨을 때 예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그럼 그 마음으로 사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는 한 손에는 주님 사랑, 한 손에는
주님 주신 사역을 붙들고 사역을 합니다. 한참 가다가
사랑은 잃어버리고 사역만 남아서 죽으나 사나 사역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랑이 식어 버리니까 죽을 맛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다가 번
아웃돼 버리는 거죠. 사랑과 사역으로 시작했다가 사랑은
식어지고 사역만 남아 있던 있는 사람이 매 주일 교회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목사가 되고 주님 맡겨 준 양떼를 목양하는
목사가 되어서 열심히 사역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사역만 남아서 매주
매주 지옥 가는 듯이 교회 가고 설교 준비를 하는데 그것만큼 부담스러워서
번하웃 때 버리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랑은 쉽고 사역만
나면 목회자들이 많다이 말이에요. 사랑 없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읽고
사랑 없이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사랑 없이 어떻게 설교를 하며 사랑
없이 어떻게 목양을 합니까? 근데 문제는 뭐냐면 괴로운게 뭐냐면 그
사랑이 없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 해야 할 사역만 남았는데
윤활할류 없는 차가 앞으로 못 가듯이 사랑 없는 사역은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번하웃 때는 목회자가 많고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한 손에는 사사명을 들고 선교지로 갔다가
선교지에서 이만저만한 일로 사랑이 식어 버리고 나니까 선교지에 버려진
것처럼 사역만 남아서 번웃돼 버리는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예수님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 사랑과 아이들 사랑을 품고 주일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첫 마음 첫 사랑 다 잃어버 사역만 남아 있다 보니까 공과
준비하고 주일날 교회 오는게 지옥으로 끌려오는 것 같이 심정으로 교회 오는
교사들은 얼마나 많고 예수님 사랑은 다 식어 버리고 사역만 남아서
번하웃으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버티는 식으로 하고 있는 교회 안에
직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딱 베드로가 그거죠. 그런 사람에게
오늘 주님이 찾아와 그런 분명한 이곳에 해당되는 분이 있다면 주님이
오늘 그분을 찾아가 그 앞에서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시는 거예요. 탈진하여
사역을 내려놓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 앞에 주님이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누구야? 사명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사랑을
회복할 때구나. 사역이 힘들어 사역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을 회복해야 될 때구나.
누구야? 네가이 사역 감당할 때 옛날에는 안
힘들었냐? 옛날에도 힘들었지만 그때는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힘든 줄도
모르고 하지 않았냐? 근데 지금도 똑같은 그 일을 하고 있는데 사랑이
식어지니까 네가 괴로운 것은 사역을 내려놓을 때가 아니라 다시 첫사랑을
회복할 때다. 베드로에게 그 말을 묻는 겁니다.
양떼를 목양하려고 하지 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먼저 물으시고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확인한 다음에 그 마음이면 양떼 먹일 수 있다.
사역을 맡기시더라는 거죠. 절대 사역 먼저 그리고 사랑이 따라오는게 아니라
사랑 먼저 그리고 사역이 따라와야 하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식지 않는 예수님 사랑입니다.
>> 여러분의 예수님 사랑이 쉽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 오늘이 아침에 >>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갈릴리 호수에
예수님과 마주 앉아 있다고 생각하시고
지쳐 있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물으시는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사역 말고 아니 교회 말고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 앞에 여러분의 식어졌던 사랑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그렇다면 예수님이 날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신 예수님의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바꾸어 예수님의 질문 앞에
우리의 대답을 한번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우리의 대답에 초점을 맞추는데 여러분에게 질문할테니까 여러분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이 중에 예수님 사랑하는 분들만 아멘
합시다. >> 아멘.
자, 다시 묻습니다.이
중에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만
아멘합시다. >> 아멘.
희한하게 점점 커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 제 의도는 점점
작아져야 되는데 잘 못 알아들으신 것 같아서 한 번만
더 질문합니다.이 중에 아니 진짜로
진심으로 누가 뭐라 그래도 진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만 아멘 해
봅시다. >> 아멘.
이 아멘이 쉬운 것 같아도
절대로 쉬울 수 없는 아멘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여러분이 제가 예수님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첫 번째 아멘과
세 번이나 물어 세 번째 여러분이 아멘해야 할 때는 농도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깊이도 다를 겁니다. 세 번째 진짜로 사랑하십니까?
진짜로 사랑하십니까를 넣어서 진심을 후하면서 물었을 때 아멘이라고 하는
그 아멘은 첫 번째 아멘과는 다른 거죠.
처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을
때 베드로는 영혼 없는 대답을 거의 했다고 봐야 돼요. 예. 예수님
사랑합니다. 바로 습관처럼 앵무새처럼 물어보니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가파오
아가파스 하느냐고 물어본 것은 진심으로 물어보신 거거든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근데 베드로는 첫 번째 질문 앞에
근심의 어떤 흔적을 볼 수 없습니다. 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
아십니다 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뻐처럼 아멘을 했습니다. 근데
주님이 두 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셔요. 아니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두 번째 물었을 때 베드로가 두 번째도 습관처럼 대답합니다. 아 예
그럼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근데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십니다.
네가 나를 진짜 사랑하느냐? 그때서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진짜 내가 이렇게 사랑한다고 막
고백해도 되는지 주님이 사랑하냐고 물어보실 때
사랑한다고 대답을 이토록 가볍게 해도 되는 건지.
여러분 정말 예수님 사랑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밀란데라의 책이 있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ove unbearable
b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라고 하죠. 영어도 안 나오네. 예.
참을 수 없는 고백의 가벼움이 있어요.
사랑하냐 그러면 아멘 합니다. 주일날 교회 나와서 손을 들고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만하고 눈물을 눈물을 비 오듯이 쏟고
예배당을 나서면 무서운 얼굴로 변하고 무서운 사장님이
되고 무서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부모가 되고
주중에 살아갈 때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그 얼굴하고
완전히 다른 얼굴로 살아가는 그 모습들을 우리는 보게 입니다.
그때 질문이 들죠. 저분이 주일날 울면서 사랑합니다 고백했던 고백은
무엇일까? 주님이 주중에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주중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리고 물으시겠죠. 우리에게. 너 주일날 얼굴하고 많이 다르다.
너 주중에도 나 사랑하냐? 너 왜 주일 얼굴하고 주중 얼굴이
다르냐? 우리의이 순간적인 고백이
너무 유통 기한이 짧고 너무 가벼운 고백들이 많지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하는이 질문은 우리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냐 하는 질문은 절대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제 친구인 김관성 목사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울산에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로 고등학교가 한 16개 정도
있었습니다. 16개인지 18개인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비슷한
숫자입니다. 근데 그 16개 고등학교 안에는
기독교 동아리가 있어요. 다 중창단입니다. 남고에는 남중창단,
여고에는 여중창단, 기독교 동아리입니다. 그 16개 고등학교가
모여서 만든 어 모임이 학원 선교 연합회라는게 있어요. 울산시에
고등학교 학생들을 다 전도하자. 그래서 저도 점심 시간, 저녁 시간에
1층, 2층, 3층, 4층을 다 울어내리면서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창단끼리 모였으니까 합창단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합창으로 1년에 준비를 해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해서 지금도 기억나는데
성혜령이라고 하는 소녀의 심장병 수술도 해 주고 그리고 중창단은 어
농화학교, 교도소 그리고 군부대를 다니면서 그렇게 어 또 복음 전도하는
특성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 학원 선교 연합회 16개 고등학교 연합회에
조직을 이끌려면 임원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저도 임원이었고
김관성이라는 학생도 임원이었고 그리고 뭐 울산고 중앙여고의 자매들도
임원이었고 해서 대여섯 명의 임원들이 자주 만나서 기도하면서 그렇게 그
조직을 이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앉아 가지고 우리가 서로
기도를 하면서 두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이 김관성이라는 학생이
우리 몇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야, 너희들은네 찬양 부를 수 있나?
나는 아무리 부르려고 해도 못 부르겠더라 이래요.
궁금해서 묻습니다. 무슨 찬양인데? 그 친구가 꺼내 놓은 찬양이 그때
우리 모이기만 하면 기타 치고 율동하면서 불렀던 많은 찬양 중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양 중에 하나인 이겁니다.
예수보다 [음악]
더 좋은 친구 없네. 예수
사랑. 참 좋은 예수 사랑. 외로울 때 다가와서
친구가 되어지는이 찬양 아시죠? 진실하신 나의 참 친구. 이렇게
이어지다가 후렴해. 주 예수
사랑하리라. 여기까지는 불러지는데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가 안 불려진다는 거예요.
너네는 이거 불러지더나 안 불러진다 그래요.
주님 사랑합니다. 주 예수 사랑하리라까지는 나오는데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안 나온다는 거예요.
야, 너네는이 찬양 불러지더나? 나는 안 불러지던데. 그래요.이
주 예수 사랑하는데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가 김관성 학생에게 목에
가시처럼 걸렸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건 맞는데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라는이 가사를 절대로 율동하며 맑고 밝게 부를
자신이 없다 이거예요. 그 말에 우리 모두 동의를 하니까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수견해졌죠. 아무도 대답을 못 했습니다.
그 질문을 난 그 친구가 한동안 고민에 빠진 것 같아요.
수개월 동안 아마
세 번째 질문 앞에 선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질문 앞에 예, 주님 사랑합니다. 두 번째 질문 예, 주님 사랑합니다. 세
번째 질문을이 친구가 그때 만난 것 같아요.
내가 내 생명 다하기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것 같아요. 한동안 몇 개월 고민하던 그 친구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 야 나 신학교 가기로 했다. 그래요.
그 깊은 고민의 결론이 깊은 주님의 사랑의 농도를 또 곱씹어
보고 곱씹어 보고 자기에게 다가온 결론이 나 그래도
주님 사랑하고 내 인생을 종신토록 하나님 앞에 드리는 주의 종이 돼야
되겠다 하고 드리게 만들더라는 거예요.
쉽게 고백해서는 나올 수 없는 결정입니다.
기계처럼 대답해서 첫 번째 두 번째 대답으로는 이러지 못하는 결론입니다.
근심하고 내가 진짜 이분 사랑하는가?
진짜 이분을 내가 목숨 나의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한다면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하고 습관처럼 율동으로 나의 생명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찬양이 아니라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나는 주를 사랑하는가? 묻고 또
묻다가 주님 다 내 모자한 거 아시지만
주께서 아시지만 그래도 나 주님 사랑합니다라는이
고백이 베드로에게도 고민 끝에 그 고백이
나오니까 십자가의 거꾸로 죽는 순교도 나오더라는 거예요.
저 또한 그 친구의 그 도전적인 질문 앞에 고민이 시작되고
그때 이후로 오늘이 시간까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이 찬양의이 부분을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떠올라서
주 예수 사랑하리라. 그때 당신은 그 부분만큼은 립싱크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또 고민하고 내가 주 예수를 나의 생명 다 할 때까지 사랑한다
부를 수 있을까? 저도 많이 그 친구가 던져 준 고민을
곱씹다가 1년 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사랑
앞에 굴복하고 그 사랑에 이끌려 저도 종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무거운 질문 앞에 무거운 대답을 계속해서 자기에게 묻고 나오는 그
대답이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이 설교를 예수님이 물으실
때 16번 설교의 마지막 설교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질문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준비하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많이 좀 울었습니다.
왜 울었냐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또는 우리를
향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이 질문이 너무 아파서
울었습니다. 주님이
너무이 질문이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말씀드렸죠. 사랑을 주기만 하던 엄마 아빠가
자녀를 보고 어느 날 어색할 정도로 너는 나 사랑하냐고 물어볼 때는
진심으로 묻는 거라고 그때는 돌려 말하지 말고
엄마 아빠의 눈을 보면서 사랑한다고 해 주라고
우리 주님이 오늘 베드로를 보고 네가 날 사랑하냐고
묻는 질문이 진심인 것은 설교 준비 중에 제가 가 한 번도 못
깨닫를 준비하면서 깨달은게 있어요.
그래서이 질문이 아팠다 아팠다 말하는데
뭘 깨달았 아세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수도 없이 수도 없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12제자가 그 두꺼운 사복음서에
난 한 번도 예수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더라고요.
찾아보세요. 서 한 번도 그 사랑 받아 놓고 12
제자 중에 한 명이 예수님 그거 아세요? 예수님 사랑합니다.
고백한 적이 없었다는 거. 12 제자는
사랑을 받기만 했지. 예수님께 사랑한다. 고백을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요한복음의
결론에 억지로라도 물어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신 그 주님의 마음이 아프더라는 거예요.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나 사랑하냐?
물어서라도 고백을 듣고 싶어 하는 아 주님도
사랑의 고프시구나. 주님도 사랑한다는 고백 듣고 싶어
하시는구나. 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 나
사랑한다. 하나님 나 사랑한다. 고백을 하고
주님 앞에 필요한게 있어서 하루에 12 번도 더 찾아오는 경우는 있어도
너 왜 왔냐 할 때 주님 좋아서요. 주님 사랑했어요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은 시대에 주님도 사랑에 많이 고프시겠구나.
오늘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은 생명까지 주고 났는데도 단 한 명도
사랑한다는 고백이 없었던 그 상황에서 주님이 물으신 질문은
아픈 질문인 겁니다. 한 번도 자녀에게 사랑을 느껴보지
못한 부모가 참다가 물어보는 질문처럼 너 엄마 아빠 사랑하니?
우리 주님이 네가 날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구하기만 바빴고 주님의 사랑 받는데만 익숙해졌던 우리에게
설교를 통해 여러분을 찾아와 주님이 물으십니다.
마지막 16 번째 질문. 너 나 사랑하느냐?이
이 무거운 질문 앞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는
긴 고민 끝에 여러분이 해야 할 여러분의 몫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