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오늘은 거의 벗고 열매를 파는 대만 여자들 빌랑
서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만에 가면 고속도로 옆이나 외곽도로의 네온
불빛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가게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통이로 되어 있어서 아니 환이 보이는데네 좀 야식꾸리하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은 아니 안 되는 모습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에 있던 사창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죠. 오히려 더 화려하고 자극적이게 꾸며져 있습니다. 유리를 통해 혼이
보이는 여자들은 거의 벗고 있거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옷을 입고
혹의를 하죠. 그러다 차량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다가가 간단한 대화를 한
뒤 돈을 받고 비닐 봉지를 건네고요.이 가게들은 매춘업소처럼
보이지만 빌랑을 파는 가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빌랑을 파는 여자들이
빌랑 서시고요. 2024년 사진 작가 콘스탄체 한이 빌랑 서시를 촬영한
사진이 CNN에까지 소개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이 사진들만 봐도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봐도 매춘 없어져.
그럼 빌랑이 뭐냐? 얼마 전에 올린 빌랑 영상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안 보셨어도 이번 영상을 보시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보고 오시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는데 안 보실 분들을 위해 잠깐만 세명하자면 빌랑은 알콜 니코틴
카페인에 이어 세 개에서네 번째로 많이 소비되는 향 정신성 물질이자
일본 발람 물질입니다. 전 세계 구강암의 1이 빌랑 때문에 발생하고
암이 아니더라도이가 건붉게 물두고 뺨이 녹아내리기도 하죠. 씹으면 각성
효과에다 중독성도 있고요. 현재도 약 6억명이 매 빌랑을 씻고 있는데
빌랑이 퍼져 있는 국가에서는 담배보다 금지하기 힘든게 빌랑입니다. 단순히
기호품을 넘어서 종교 의식에도 사용되고 사회적인 의미도 큰게
빌랑이거든요. 과거 인도에서는 빌랑을 씹어 건붉게 물든이가 귀족과 왕족의
품이 지성을 상징하기까지도 했고요. 과거에는 해악을 잘 몰랐기에 오히려
바란 물질이 아니라 건강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며 기적의 열매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죽음의 열매로 바뀌었지만요. 현재도 빌랑이
퍼져 있는 심는 국가들 중에서도 대마는 어떻게 보면 가장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다른 국가는 과거부터 있었고 사회적인 의미도 크니까 또
중독돼서 씹으면 기분 좋으니까 계속 씹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대만도
비슷하긴 하지만 근대에 와서 폭발적으로 소비가 증가한 케이스다
보니 상징이나 모습이 좀 다르죠.이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모습이 오늘의
주지인 빌랑 서시고요. 그런 빌랑이 대만에서 어떻게 퍼지고 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빌랑 서신은 어쩌다
생겨났는지까지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죠. 다른 국가들과 같이
다이소섬에서 빌랑이 사용된 건 아주 아주 옛날부터입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만
원주민들에게 빌랑은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문화였습니다. 종교 의식에도
사용했고 점수의 도구이기도 했으며 빌랑을 선물하는 건 사회적 유대의
상징이었죠. 결혼식에서 빌랑을 나누는 건 축복의 의미였고 손님이 왔을 때
빌랑을 내놓는 것은 압도적 환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원주민 부족 중 하나인
아미족에서는 어머니를 상징했죠. 붉은 빌랑집은 어머니의 젖을 뜻했고요.
마치 발렌타인 데이처럼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빌랑을 선물하는 것은 구회의
표시였습니다. 남자가 이걸 씹으면 그래나도 네가 좋다라는 뜻이었고요.
멋지되었던 몇 천 년 몇백 년 동안 나름 평화롭게 빌랑을 씹으며
살아왔는데 17세기가 되면서 대만의 평화는 깨지게 됩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식민집도 받았고 정성공이라는 인물이 1661년 네덜란드인들을
몰아내고 동영국이라는 이름으로 대만섬을 통시하게도 했죠. 이때
중국에서 한족들이 대만섬으로 대규모 이주를 했습니다. 정성공이 사람들을
이끌고 대만섬으로 온 이유는 단청북명 청나라에 대항하고 명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였죠. 즉 본토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또
네덜란드와도 전쟁을 했고 청나라와도 싸워야 했기에 원주민들과는 최대한 잘
지내려고 했습니다. 근데 뭐 말이 자리 주는 거지 점령한 것이었기에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는 원주민들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다
죽였죠. 이때 원주민들에게 한족이 유교 문화가 전파되었는데 원주민들이
전파한 것도 있었습니다. 바로 빌랑이죠. 그런데 이것도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1683년 청나라와의 평호회전에서 동영국이 개멸하면서
동영국은 멸망했고 자연스럽게 청나라가 대만섬을 통치하게 되었거든요. 이때도
빌랑은 살아남았습니다. 비록 청나라 사람들은 대만 사람들이 길거리에 붉은
침을 뱉는 것을 보며 경멸하고 혐오했지만 뭐 딱히 금지까지는 하지
않았거든요. 강의재 시기에 쓰인 대사록에서는 내뱉는 침이 마치 고름과
피가 혐오스럽다라고 대만 사람들을 묘사한 기록도 남아 있죠.이 상태로
약 200년이 흘렀습니다. 이사이 대만섬으로 더 많은 한족들이
유입되었죠. 일부 원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산으로 숨어들어 고산족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한족들에게 동화되었습니다. 문화도
생활 방식도 생각도 전부 말이죠. 그럼에도 빌랑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1895년 청의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대만을
일본에하게 되면서 빌랑은 대만섬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식민지 대만을 문명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전통이나 관습이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부었습니다. 원주민이든 원주민이 아닌 대만인이든간에 대만섬에서만 있던
특징들 관습들은 전부 악으로 규정되었죠. 빌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빌랑은 위생적으로도 불결하다고 여겨져서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탄압했죠. 대만 총독부는 길거리에서 붉은 침을 뱉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보였다 하면 때렸습니다. 아예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빌랑나무도 싹 다 베워 버렸죠. 나무까지 싹 다
배워 버리니 뭐 별다른 수가 있네요. 빌랑은 대만섬에서 찾기 힘든게 되어
버렸습니다. 앞서 나왔던 고산족이나 하층 노동자들 사이에서 아마암리의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죠. 그렇게 서서히 빈랑은 사라지는 듯했는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대만은 또다시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초기에는 물자도 부족하고 물가도 난리가 나면서 고인플레이션으로
혼란스러웠지만 1950년대 미국의 원주와 더불어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죠. 1960년대 대마는 경제적으로
날아올랐습니다. 공장이 들어서고 도로가 깔리고 도시와 도시를 잇는 또
한구를 잇는 고속도로가 들어섰죠. 이른바 아시아의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수출 주도형 고도 성장을 이룩하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가 되자 대만의
도시는 완전히 변했죠. 마천루가 솟아 올랐고 도시의 전반적인 모습도
현대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했던 경제기적의 기초를
다진 것은 다름 아닌 대만의 블루 컬러 노동자들이었죠. 트럭 운전사
건설 현장의 인부들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마땅히 다른
운송 수단이 없었기에 당시 대만에 사실상 거의 모든 물료를 책임지는
직업이 트럭 운전사였죠. 한국도 과거에는 그랬듯 아니 모든 국가가
산업화 초기에 그랬듯 어느 정도 경제 수준에 올라서기 전까지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는 개판입니다. 근무 시간이나 강도가 빡센 건 당연하고
안전도 개판이기에 안 죽으면 다행이죠. 하루 12시간 넘게
도로비를 달려야 하는 까딱 잘못해서 졸기라도 하면 죽는 트럭
운전사들에게는 뭔가 정신을 처리만한게 필요했습니다. 담배도 있었지만 뭔가
좀 부족했죠. 커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커피 피로 회의
복재 담배보다 더 즉각적이고 강력한게 필요했죠. 그렇게 대만섬에서 자체를
감추었던 빌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70년대부터 빌랑의 수요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특히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사서 빌랑을
씹는 경우도 있었지만 고용주들이 작업에 능률을 올리고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빌랑을 무료로 뿌리면서
중독자들이 넘쳐나게 듭니다. 빌랑도 안 주면서 일을 시킨다고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이미 다 배워 버렸는데 어디서 가져오냐 다시 심으면 되죠.
농부들에게 빌랑은 녹색 금이라고 불렸습니다. 빌랑나무 한 그루를 심는
데는 큰 돈이 안 되지만 생산에는 빌랑은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었거든요. 1년에 두 번이나 수학을 할 수 있었고요. 빌랑보다 수익성이
좋은 농작물은 사실상 없었죠. 농부들은 수익성도 낮고 힘든 변농사를
때려치우고 재배가 쉽고 수익률도 높은 빌랑으로 싹 다 바꿨습니다. 그냥 좀
많이 생산했다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90년대에 가서는 대만에서 생산되는
빌랑의 가치만 42억 달러였죠. 당시 대마는 전 세계 생산량이 21%를
차지하는 세계 2위의 빌량 생산국이 되었고요. 공급이 많아지니 가격도
안정되었습니다. 가격이 착해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빌랑을 씹었죠. 물론
대만 정부에서도 빌랑의 해악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이 씹으면 큰일
납니다. 안 됩니다. 캠페인을 했죠. 하지만 전혀 안 먹혔습니다. 오히려
소비랑은 늘어나기만 했죠. 보통 건강이 안 좋다고 하고 캠페인까지
버리면 없애지는 못해도 줄어는 듭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전혀 안
먹히는 건 이게 그 사회에서 전통이자 문화이거나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
때죠. 그런데 대만에서 빈랑은 일본의 식민지배식이 명맥이 한번 끊기면서
전통문화라는 인식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산업 경제
성장과 함께 퍼졌죠. 그럼 무슨 상징성이 있었냐?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회적인 이미지와 연대, 하나는 정치였죠.
산업화 이후 대만에서 빌랑은 손님이나 결혼이 아닌 남자들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빌랑을 씹는 건 힘든 육체 노동을 하는 남자들의 남성.
터프한 마초의 상징이자 함께 빌랑을 씹는 건 남성을 공유하는 것이었죠.
육체 노동을 하는 노동자 계층에서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요라며 빌랑을
씹지 않는 건 네가 남자라는 시선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에서 담배를 피는게
멋있게 나오는 것 같은 뭐 그런 인식이 있다고 봐야죠. 정치적으로는
1980년대 후반 대만의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될시기 국민당 엘리티들에
대항하면서 대만 본토의 정통성이라는 개념이 뜨게 되었는데 엘리트 계층이
경멸했던 하측민들 노동자들의 관습인 빌랑이 대만다운 것 대만의 진정한
문화인 타이커의 상징이 되었죠. 우바이와 같은 대만의 롱뮤지션들이
북경어가 아닌 대만으로 하측민의 산과 빈랑을 노래하면서 폭발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습니다. 전통과는 다르지만 산업화 속에서 남성과 남자들의 유대를
다지는 매개체 노동자층과 대만다운 것을 상징하는 정치적인 상징이 되면서
빌랑의 정성기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여죠. 그런데 수요도 공급도 많았던
빌랑 시장에서 정작 피말리는 전쟁 터인 곳도 있었습니다. 빌랑을
생산하는 농부도 큰 돈을 벌었고 중간 유통상들도 돈을 벌었지만 정작
소매상들은 아니었죠. 수많은 트럭이 오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와 국도변에는
수천 개의 빌랑 소매상들 노점이 들어섰지만 뭐 빌랑이 특별히 차별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리가 다였기에 일부 자리 잘 잡은
소매상들을 빼면 경쟁에서 도태되었습니다. 여기서 빌랑서씨가
등장합니다. 빌랑시는 마초맨들의 눈길를 화끌고 단번에 차를 세우게
만들 수 있는 옆집과 우리 집이 똑같은 빌랑을 팔지만 굳이 우리
집에서 빌랑을 사게 만들 방법 예쁜 여자를 쓰자죠. 서신은 춘추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미인으로 양기비와 함께 중화권에서 미인하면 나오는
이름입니다. 빌랑서 빌랑파는 미녀라는 뜻이죠. 빌랑서 씨의 기원에 대한
설은 그게 두 가지인데 대만중부 광동에서 쌍둥이 빌랑가게라는 이름으로
젊은 여성 판매원을 고용해서 성공해서 퍼졌다가 있고 1970년대 차우튼
지역에서 시의 자매가 어머니의 노점을 물려받아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빌랑을 팔았는데 주변 빌랑 가게를 다 쓸어 버릴 정도로 대박을 쳐서
퍼졌다가 있습니다. 사실 중요한 건 아니죠. 누가 원조든간에 어차피
나타날 현상이었으니까요. 사실 남성분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실 겁니다.
학생 때 PC방 갔던 걸 생각하면 내 뭐 PC방이야 해주는 서비스가 컴퓨터
있는게 다인데 다 똑같으니까 예쁜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게 돼 있죠.
지금이야 음식도 다양하고 시설도 좀 차별화가 있지만 당시에는 컵라면 사면
직접 해 먹어야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빌랑 소매점에 젊은
여자들이 많이 유입되었죠. 그런데 지금처럼 노출이 심하고 야 거의
매춘업소인데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전고 예쁜 여자가 빌랑을 파는
것도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죠. 20대의 전고 아름다운 여성이 빌랑
노점을 여는 경우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이 여성이 노출을 하면서까지
빌랑에 파는 경우도 많지 않았고 그렇다고 빌랑 노점상들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라 고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고용한다고 해도 팔라고
고용하는 거지. 노출까지 하라고 하면 내 안 하죠. 그런데 1990년대
대만 노동 시장이 격변합니다. 대만 기업들, 제조 업체들, 공장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중국 본토로가 버렸거든요. 특히 여성들이 많이
일했던 섬유 산업은 싹 다 빠져나갔죠. 공장이 일하던 젊은
여성들은 한 순간에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죠. 이때 수많은 여성들이 유흥쪽으로 빠지기도 했는데
유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고수익을 원했던 여성들은 빌랑 판매 쪽으로
빠졌습니다. 돈이 간절했기에 취직할 것도 없었기에 빌랑 소매점 사장들이
과한 노출을 원한다고 요구해도 어쩔 수 없이 오케이했죠. 그렇게 몇 달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빌랑 판매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어디서 물건을
받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이게 창업하는데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가 하루 종일 파는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팔자가
됩니다. 90년대 후반 대만 저녁에 10만 개 이상의 빌랑 부스가
생겨나게 되죠.이 중 60% 이상이 빌랑 서시들이 운영하는 가게였고요.
말이 좀 그렇긴 한데 이때가 빌랑서시 문화의 전성기였죠. 대만 어디를 가도
빌랑 서시들을 볼 수 있었고 거리 풍경에 일부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화려한 네온 불빛 야시시시안 복장은 대만문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질
정도였죠. 물론 대만 정부는 싫어했지만요. 여행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내리에 박히는 장면이 없었고요.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봐야 할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로 대만 특유의 구경거리였습니다. 대만 영화에서
소재로 쓰이기도 했죠. 2001년 영화 베테너 뷰티가 대표적입니다.
베릴링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작품이죠. 이외에도
해외에서 다큐를 찍어 가는 경우도 많았고요.이시기 작품들을 보면
빌랑서시는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 느낌으로 묘사됩니다.
뭐이 정도야 성매매가 합법인 국가도 있는데 문제가 있나 싶었지만 얼마한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10만 개 중 6만 개 많이 생겨도 너무
많이 생겼다는 거죠. 경쟁이 치열해지자 빌랑 서시들의 마케팅은 더
자극적이게 변해 갔습니다. 안이 헌이 보이도록 통리로 만드는 건 기본이고
노출도 거의 벗고 다니는 수준으로 바뀌었죠. 비키니부터 란젤리 코스프레
의상까지 등장했고요. 가장 큰 문제는 유흥 쪽에서 일했던 여성들이 일을
그만두고 빌랑 서시가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빌랑만 파는게 아니라 다른
것도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돈을 받고 하기도 하고 단골 관리분으로
유사 성행위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모든 빌랑 서시가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상당히 많은 수가 있고 여행객들은 이걸
목적으로 빌랑 서시를 찾아가기도 되죠. 결국 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규제를 시작한 건 타이베이었죠. 이른바 산불 정책인데
배 가슴 엉덩이를 노출하는 걸 금지하는 규제였습니다. 타이시에 이어
다른 지방에서도 복장 규제가 퍼졌고 일부는 도심 지역에서 빌량 판매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죠. 빌랑 서시들의 대답은 시위였습니다. 우리의
오차림을 정부가 통제해 권리가 있냐? 어디서부터 과대한 노출인지 정할 수
있냐? 비키니도 배가 노출되는데 그럼 비키니도 금지할 거냐? 뭐 이런
느낌이었죠. 여성 단체들이 나서서 빌랑서시가 착취다라고 비판하는데
반대편에서 당사자들은 우리가 왜 착취를 당하는 거냐? 노출하게 해
달라 규제하지 말라고 외치는 아이러니도 벌어졌고요. 사실 빌랑서
씨 입장에서는 자기 비즈니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요?
하면 벌금이라는데 못 하죠. 사실 규제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도심해서 안 된다는 거지 주로 장사하는 고속도로
적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진짜 문제는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거죠. 대만의 경제가 고도화되면서 빌랑서시의 주고객칭인 블루 컬러
노동자의 숫자도 급격히 줄었고 대만 정부의 캠페인과 별개로 빌랑에 대한
위험성이 유튜브 SNS를 타고 알려지면서 또 미관상 안 좋게
여겨지면서 빌랑 자체의 수요가 줄었거든요. 지금 대만의 청년층에게
빌랑은 촌스럽고 해로운 옛날 것 정도입니다. 물론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10만 개에 달라던 화려한 네운으로 꾸며진 빌라 가게들은 이제
수천개 수준으로 세퇴했죠. 지금 현재도 찾으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전성기 수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매춘 업소처럼 보일 정도로 야식꾸리한
옷을 입고 영업을 하고 있지만요. 최근에는 아예 오프라인 매장을 접고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빌랑서도 많다고 합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배달도
해주고 자기 얼굴이 박힌 굿즈도 팔고 뭐 약간 인플루언서처럼 한다고
하네요. 빌랑 서시에 대한 이야기 편은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