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2022년부터 큰 인기를 끌고 방영됐던 리얼리티 쇼 두바이 블링 해당 프로그램은 두바이에 거주하는 다양한 국적의 100백만
장자들의 호화로운 일상과 개인사를 다뤄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동시에 두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한국인을 포함해 외국인들이 품고 있는 환상 즉
두바이는 슈퍼리치의 도시라는 편견을 강화시켜 주기도 했죠 실제로 네이버나 구글에서 두바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두바이 부자 슈퍼카 순금 커피 등등의
관련 키워드들이 함께 추천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두바이는 역시 환상의 도시 부자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하죠 미디어에 비친 모습 이면에 진짜
두바이는 어떨까요? 두바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중동의 뉴욕 그리고 중동의
홍콩이라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통 복장인 토프를 뒤집어쓴 아랍인들이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를 타고 도시를 활보하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인도계 아랍계 유럽계 그리고 한중일 동아시아인까지 다양한 민족들이 한대 어울려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번화한 경제 허브 도시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두바이의 인구는 대다수는 이민자 그것도 국적도 없는 이민자로 글로벌 도시로 꼽히는 싱가포르와 뉴욕보다도 더 외국인과
이민자의 비중이 높습니다 사실 부자라는 이미지와 달리 두바이는 주변 아랍국들에 비하면 그렇게 부유한 편은 아닙니다 두바이가 소속된 UAE는
7개 토후 즉 작은 왕국의 연합국이죠 7개국 소왕들의 자존심이 민감하게 걸려 있는 만큼 각 나라별 GDP는 공개하지 않고요 UAE 통합 GDP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월드뱅크 추산에 따르면 UAE의 GDP는 2022년 기준 53,000 달러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도 행정 수도이자 최대 영토를
자랑하는 아부다비가 7개국 중 최고 부자 지역으로 약 10만이 넘어서는 걸로 추정되고요 반면에 두바이는 UAE 평균 수준인 5만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또 두바이 아부다비와 함께 항상 아랍 일 때 부국으로 묶기는 인근의 도시 국가 카타르의 GDP는 같은 통계 기준으로 무려 87,000 달러에
달합니다 서울의 2022년 기준 1인당 지역 GDP 즉 GRDP가 5만 달러를 넘은 걸 계산하면 냉정하게 말해서 두바이가 서울보다 더 부유한
도시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아랍의 번영과 부유를 상징하는 도시로 두바이가 꼽히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로는
도시의 개방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두바이의 경우 아랍 절대 군주정 그리고 이슬람 국가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리 서울 만큼이나
개방도가 높은 국가입니다 종종 두바이를 가보면 UAE 국적의 로컬 아랍인들 중 보수적인 여성들은 한 여름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아바야 몸을 둘둘 감싸고 걸어다니지만 또 그 바로 옆을 숏팬츠와 운동용 슬리브리스를 입고 빠르게 조깅하는 외국인 여성들을 지나치곤 합니다
두바이의 자랑거리인 두바이 물 스타벅스에 가면 흔히 다인종 사회를 상징하는 샐러드 볼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백인과 라빈이 뒤섞인
손님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와중에 인도계 직원이 인도양이 짙은 영어로 목청 크게 주문 번호를 외칩니다 동아시아계 바리스타는 열심히
카페라떼를 옆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도심지 기준으로는 아랍어 다 오히려 영어가 더 공영로 통용되는 수준의 국가 두바이 심지어 술과 돼지고기는
모두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기로 여겨짐도 불구하고 두바이에 있는 한식당을 가면 합법적으로 삼겹살과 소주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두바이의 또 다른 강점은 물질적인 인프라입니다 828m로 세계 최고층 빌딩은 부르즈 할리파 1층에는 딘타이펑 비롯해
레드랍스터 텍사스 로드하우스 등 굵직한 글로벌 유명 FnB 브랜드들이 빼곡히 입점해 있습니다 브루즈 할리파 한복판의 음악 분수에는 영어와
아랍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어 노래에 맞추어 물결이 춤을 추고 레이저 쇼도 벌어집니다 높이 150m 달하는 창문 모양의 직사각형 마천루 두바이
프레임은 부르즈 할리파에 맞서는 두바이의 새로운 랜드마크입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카르멘과 같은 굵직한 블록버스터
공연이 오리지널 캐스팅 배우들 중심으로 매일 상영되고 있습니다 카타르 도하 라던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도 많은 부분을 벤치마킹해
두바이와의 격차를 줄이고자 하지만 아직 두바이를 쫓기는 어렵습니다 물리적인 인프라는 자금을 부어 단기간에 추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도시에 개방도
쫓기는 쉽지 않죠 사우디 man 해도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시잡 착용 의무를 폐지한지 아직 5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방 된 도시고
번영된 도시라는게 절대로 천국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유한 아랍 도시들이 그런 듯 사실상의 신분제 사회가 두바이에서도 유지되고
있죠 소수의 UAE 국적 아랍인들은 사회적으로 상류층의 삶을 누리고 있으며 무상 의료와 사실상 무료 주택의 기회를 누리고 있습니다 유럽계
이민자들과 성공적으로 정착한 타 아랍 국가 이주민들 그리고 부유한 타 아시아 국가 이민자들은 중상층 및 중산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인들의
상당수도 여기에 포함되죠 이들의 가구당 소득은 대체로 연간 30만 디르함 한화로는 약 1억 원 이상 되는 집들입니다 두바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여타 아랍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이 서민 및 빈곤층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일용직 건설
노동자 운전수 베이비시터 가정부 등 단순 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최저시급과 4대보험 개념이 없는 두바이의 특징상 월급이 한화 기준으로
100만 원도 되지 않을만큼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두바이의 물가는 서울에 두배에 가깝죠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들 빈곤층의 경제적 수준이 얼마나
낮을지 예상하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두바이의 고용과 체류가 전적으로 고용주의 비자 발급에 따라 좌우되는만큼 사실상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빈부격차와 취약한 복지 그리고 피라미드형 소득 구조라는 측면에서 중동의 뉴욕 중동의
홍콩이라는 단어는 뉴욕이나 홍콩의 나쁜 점을 두바이가 그대로 빼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두바이가 글로벌 도시가 된지도 그리고 부국이 된지도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진 않았습니다 독립한 역사도 약 60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도시 국가 초기에는 별다른 부존 자원조차 존재하지 않아 gcc
내에서도 가난한 도시 국가 이 두바이는 어떻게 60년 만에 중동의 뉴욕으로 성장했을까요 우선 고대 역사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두바이는
고대부터 사람의 거주 흔적이나 기록이 자주 남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대인들의 유적이나 문화재가 종종 발견되는 두바이의 강남대로에 해당하는
쉐이크 자이드로드 근처에서는 BC 7,000 년경 맹 그로로 뒤덮힌 아열대 습지임을 증명하는 유적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이후 해안선이 점점
밀려나면서 두바이에 전반적인 사막화가 진행됐는데 사막기후의 척박함과 여름 더위의 가혹함 때문에 고대인들의 눈길를 사로잡지 못하며 다른 지역에
비해 고대인들이 늦게 정착한 탓입니다 두바이 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UAE의 또 다른 구성국 라스 알 카이마는 기원전 5000년 경 그리고 두바이의 남쪽인
아부다비에서도 기원전 3000년 경의 유적이 발견되는 걸 보면 아마도 늦어도 이 시기 정도에는 두바이에도 사람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상대적으로 타지역에 비해 거주 여건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유목 업과 대추야자 농사를 생계로 삼은 소수 부족들이 이 두바이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두바이는 지정학적으로 가치가 높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호르무즈 해협 쪽으로 쭉 뻗은 반도 모양을
취하고 있는만큼 고대부터 지정학적 요충지로 꼽힌 지역이죠 두바이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건너면 고대부터 인구가 밀집하고 문화가 꼽힌 페르시아
곧 오늘날이란 지역입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를 거쳐 사산조 페르시아에 이르까지 꾸준히 두바이는 인접한 아랍보다는 바다 건너 이란의 영향권에 들었습니다
동시에 척박한 기후 탓에 농업적인 가치보다는 상업적 그리고 지정학적 요충지인 항구로서의 가치가 더 높았죠 기원후 6세기경 현재 팜 주메이라
지역에서 낙타 대상의 유적이 발견됐다는 점은 바로 이런 점을 증명해 줍니다 이어 이슬람의 첫 번째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점령되면서 두바이는 마침내 페르시아이란 문화권에서 벗어나 아랍 문명권의 정체성을 띄게 됩니다 아라비아 반도 중서부에 출연한 우마이야
왕조가 후에 출연한 몽골 제국에 비견될만큼 빠르게 세력을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확장하면서 왕조의 동쪽 출입문과 같은 거점 항구인 두바이의
가치도 높아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18세기까지 두바이는 여전히 잠깐 거쳐가는 지역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규모의 교역 고기잡이
영세한 수준의 농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형성돼 있었으며 인구수는 고작 수천명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도시인
카타르 도하와 같이 진주조개의 산지로 잘 알려졌다는 점입니다 자 우리가 아는 두바이 역사는 1833년에 출발합니다